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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의 금융산책] “세계에서 가장 힘 센 사람은 누구?” … 클린턴 대통령의 답은 "중앙은행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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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누구냐.”

현대의 연금술사, 중앙은행장은 누구인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통화정책 총괄 #발권력 장악하려는 권력자와 충돌 불가피 #독립성 유지가 중앙은행의 운명 갈라

 어느 기자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NBC 백악관 출입기자인 안드레아 미첼을 가리키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에게 물어봐라. 그가 (가장 힘이 센 사람과) 결혼했으니까”

 미첼의 남편은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다. 대안정기를 이끌며 ‘세계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Fed 의장을 18년 3개월간 역임한 인물이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중앙포토]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중앙포토]

 중앙은행은 정부 기관이 아니지만 통화의 독점 발행권을 갖는다. 국가에서 통화발행 권한을 위임받은 이들은 종이와 인쇄기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 중앙은행장을 현대의 연금술사로 부르는 이유다.

임명된 것만으로 엄청난 권한을 쥐는 만큼 중앙은행장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통화 발행권 독점, 통화안정과 경제 번영 책임져

 대부분의 나라에는 중앙은행법이 별도로 있다. 한국에도 ‘한국은행법’이 있다. 한은법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무자본 특수법인이다. 출자해 주식을 보유한 주주 또는 주인이 없다는 의미다. 주주가 있는 미 연방준비제도(Fed)나 스위스 중앙은행 등과는 다르다.

 무자본특수법인인 만큼 정부부처처럼 엄격한 예산ㆍ조직 통제를 받지 않는다. 기업처럼 이윤을 내야 하는 압박도 없다. 이익이 생기면 국고로 넘어간다. 한은법에 따르면 법정적립금(수익의 30%)을 제외한 모든 이익은 국고로 넘겨야 한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대통령.

 한국은행을 비롯한 중앙은행은 법이 부여한 권한을 통해 금리를 조절하고 경제 전반의 통화 흐름을 결정한다. 때문에 금융시장은 중앙은행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대신 정부는 중앙은행에 통화안정과 경제의 지속번영을 위한 책임을 지운다. Fed는 물가안정과 완전고용을, 한국은행은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책임진다.

 “인류의 3대 발명은 '불, 수레, 중앙은행'”

 중앙은행은 인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제도 중 하나다.

 미국의 배우이자 사회평론가인 윌 로저스는 1920년 “역사가 시작된 후 세 가지 위대한 발명이 있었다. 불과 수레바퀴, 그리고 중앙은행이다”고 말했다. 7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 MIT 명예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언급했다.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니얼 퍼거슨은 “화폐의 부상과 금융의 발전은 인류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 건물. [중앙포토]

미 연방준비제도(Fed) 건물. [중앙포토]

 그 중심에는 중앙은행이 있다.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통화 덕분에 근대 경제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핵심으로도 여겨진다.

 중앙은행의 힘을 확인시켜 준 사건 중 하나가 세계금융위기다.

 특히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인 중앙은행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줬다. 최종 대부자는 금융 시장에 패닉이 덮쳤을 때 누구든 중앙은행의 문을 두드리면 담보를 잡고 아낌없이 대출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금융시스템 작동을 위해서다.

 세계금융위기 당시 주요국 중앙은행이 ‘소방수’를 자처하며 경제 살리기에 앞장섰던 이유다.

 중앙은행이 ‘최종 대부자’가 돼야 한다는 건 영국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이던 월터 배젓이 1873년 펴낸 『롬바르드 스트리트:통화시장에 대한 묘사』에서 처음 제기됐다.

중앙은행의 역할을 규정한 이 책은 금융 위기를 다루는 중앙은행장에게는 바이블이 됐다.

세계금융위기의 파고가 덮치자 전 세계 중앙은행장은 대대적인 발권력을 동원해 수렁에 빠진 세계 경제를 살려냈다.

 대통령이 2명 이상 못 바꾸게 Fed 이사 임기는 14년  

 중앙은행의 고유 권한이자 힘의 원천인 발권력은 경제를 살리지만, 때론 중앙은행의 운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돈을 찍어낼 수 있는 힘은 모든 권력자에게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그래서 중앙은행장을 좌지우지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압박에 맞서 중앙은행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장은 노력하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1951년 한국 전쟁의 영향으로 미국의 물가가 올랐다. 당시 토마스 매케이브 Fed 의장은 금리 인상을 추진했다. Fed의 목적인 물가 안정을 위해서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고 경기를 살리고 싶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임기 3년 차인 매케이브를 물러나게 했다. 대신 말 잘 들을 것 같은 재무부 차관보 윌리엄 마틴을 Fed 의장으로 임명했다.

트루먼의 오판이었다. 마틴은 Fed 의장이 되자 ‘물가 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목적에 맞게 긴축 정책을 펼쳤다. 트루먼은 이런 마틴을 “배신자”라고 몰아붙였지만, 마틴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틴이 단명하지도 않았다. 그는 원칙을 지키면서 필요할 때는 정부와 협조하는 절묘한 통화정책을 펼치며 Fed 의장 중 최장인 18년 10개월간 의장직을 수행했다.

중앙은행은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의 장치도 마련해 둔다.

대표적인 것이 Fed의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이사의 임기다. FOMC는 29년 대공황에 대응하지 못한 Fed를 개혁하기 위해 35년 은행법에 따라 만들어졌다.

2013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설립 100년 기념식에 모인 역대 Fed 의장들. 왼쪽부터 재닛 옐런, 폴 볼커,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전 의장. [중앙포토]

2013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설립 100년 기념식에 모인 역대 Fed 의장들. 왼쪽부터 재닛 옐런, 폴 볼커,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전 의장. [중앙포토]

 FOMC는 12명의 위원으로 이뤄져 있다. 의장과 부의장을 포함한 7명의 Fed 이사와 뉴욕 Fed 총재가 상임위원을 맡는다. 11개 지역 Fed 총재 중 4개 지역 총재가 순번에 따라 위원을 맡는다. 7명의 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는다.

 Fed 이사의 임기는 14년이다.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리너 에클스를 7대 Fed 의장으로 내정하면서 개혁 방안을 주문했다.

에클스는 10년이던 Fed 위원의 임기를 14년으로 늘리되 홀수해 2월 1일에 한 명씩 교체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통상 2년마다 한 명씩 임기가 만료된다. 어떤 대통령도 자신의 4년 임기 중 FOMC 위원을 2명 이상 바꿀 수 없다.

대통령이 연임해도 4명만 교체할 수 있다. 12명의 위원 중 3분의 1만 자기 사람으로 채우는 황금 법칙을 만든 것이다.

 트럼프, 연임 관례 깨고 Fed 의장 교체…이사 4명 임명할 듯

 하지만 최근 이 규칙이 사실상 깨졌다. 재닛 옐런 전 Fed 의장이 연임에 실패하면서부터다.

재닛 옐런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지난해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재닛 옐런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지난해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4년 임기를 마친 옐런을 재선임하지 않았다. 관례였던 Fed 의장의 연임 규칙이 무너진 것이다. 옐런은 의장 퇴임과 함께 Fed를 떠나는 관행에 따라 이사직도 사임했다. 이사 옐런의 임기는 2024년 1월까지였다.

여기에 2019년 1월까지 임기였던 윌리엄 더들리 뉴욕 Fed 의장도 개인적 사유로 조기 퇴임 의사를 밝혔다. 그 결과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중 4명의 Fed 위원을 뽑을 수 있게 됐다. 중앙은행 내 트럼프의 입김이 더 세지게 됐다.

미연준

미연준

정파가 달라도 Fed 의장은 바꾸지 않는 것은 최근의 불문율이었다. 미국 공화당의 조지 W.부시 전 대통령(아들 부시)은 임기 중 같은 공화당원인 벤 버냉키를 Fed 의장으로 임명했다.

다음 선거에서 민주당의 버락 오마바 대통령이 승리하면서 정권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러나 버냉키 의장을 유임시켰다. 하지만 공화당의 트럼프는 민주당원인 옐런의 연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롬 파월 신임 의장은 공화당원이다.

 이주열 총재 유임…한은법상 금통위원도 연임 가능

 중앙은행이 정권에 휘둘리는 것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8년 한은법 개정 전까지만 해도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은 재무부 장관이 맡았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노리는 정부와 정치권의 압박은 수시로 이어졌다.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재정 지출보다는 윤전기를 돌려 돈을 찍어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판 양적 완화’를 주장하며 기업구조조정을 위한 자본확충펀드에 한국은행의 출자를 종용한 것이 대표적인 일이다.

정권이 바뀌면 총재와 금통위원이 모두 새 얼굴로 교체됐다. 한국은행 총재가 임기를 채우고 물러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순 전 총재는 김영삼 정권과의 갈등 속에 취임 1년 만에 사퇴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 7명의 한국은행 금통위원을 모두 교체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7일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해 밝은 표정으로 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7일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해 밝은 표정으로 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새로운 장이 열렸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차기 총재로 임명되며 98년 한은 독립성 확보 후 처음으로 연임의 길이 열렸다. 정권 교체에도 전 정권이 임명한 총재를 유임시키는 선례도 남겼다. 통화정책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금통위원의 연임은 현재까지 없었다. 한은법에 따르면 총재와 금통위원은 모두 연임이 가능하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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