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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아시아가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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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우리는 중국(中國)의 동쪽에 있는 나라란 뜻으로 동국(東國)을 자처했다.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이 나온 배경이다. 내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면 내가 중앙이 되는데 우리 스스로 변방 국가라 말한 셈이다. 왜 그랬나. 중국인이 자기 자신을 중국인이라 자처하는 걸 듣고 그대로 비판 없이 수용하고 믿은 결과다. 중국은 세상의 중앙인가? 중화 문명은 더 우수했나? 중국사는 한족(漢族)의 역사인가? 따져볼 게 한둘이 아니다.

중국은 세계 ‘중앙의 나라’ 아닌 #중원 지역 차지한 국가를 의미해 #중화는 자신 높이고 남 깎는 표현 #애국심 주창한 약자 슬로건 불과 #중국사 역시 한족의 역사 아니라 #중원을 지배한 많은 종족의 역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보면 ‘중국’이란 단어가 419회 출현한다. 이때 쓰인 중국은 ‘중심에 있는 나라’가 아닌 ‘중원(中原)에 있는 나라’란 뜻이었다. 중원은 지금의 허난(河南)성 일대로 황하(黃河) 중·하류 지역이다. 최초로 중원을 통일한 진(秦) 역시 중국으로 불리지 않았다. 서쪽 야만이라는 뜻의 서융(西戎) 정도로 생각됐을 뿐이다.

한데 중원에 있는 나라인 중국의 의미가 언제부터인지 중심에 있는 나라, 중앙에 있는 나라로 바뀌었다. 중원 사람들은 이후 자신은 문명국이고 동서남북에 사는 사람은 야만인이라며 동이(東夷)와 서융,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으로 호칭했다. 모든 종족은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을 멸칭(蔑稱)하고자 하는 속성을 갖는다. 문제는 우리가 중국인의 인식을 수용했다는 점이다.

여기엔 우리가 언어적 마술에 걸린 측면이 있다. 바로 중화(中華)란 단어다. 화(華)란 문화, 문명이 뛰어나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건 서기 299년 서진(西晉) 말이다. 강통(江統)이 “융인(戎人)과 적인(狄人)이 중화 지역을 어지럽히니 일찍이 그 원인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사융론(徙戎論)’을 지어 조정에 보낸 데서 비롯됐다. 중화는 북쪽 야만인들이 침략해오고 있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 동원된 말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중원 지역을 지켜야 하겠는데 그 이유를 중원의 문화가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중화란 단어는 중외(中外)를 문명국과 야만국으로 구분하려는 대립적 구도 속에서 탄생했다. 자기를 높이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자존과 멸칭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당시 실제 상황을 보면 중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3세기 말부터 북방 유목문화를 가진 종족들에게 밀려 자리를 내줘야 했다.

문화란 어느 게 더 우수하고 덜하다고 평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굳이 따지라면 우수한 문화란 어느 문화를 가진 집단이 더 강력한가를 갖고 판가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원으로 물밀 듯이 내려온 오호(五胡)의 문화가 중원의 문화보다 더 우수하다고 말해야 옳을 듯하다. 중화란 자기를 지키려는 애국심 고취의 구호에 불과하다. 약자의 슬로건, 이것이 중화다.

유목민은 야만적인데 단지 싸움만 잘한다는 건 중국인 중심의 해석일 뿐이다. 농경문화를 가진 중원 지역은 그 발전을 저해하는 근본적 구조를 갖고 있다. 농경사회에 맞는 전제적 통치 구조가 그것이다. 중원은 황제 절대권을 일찌감치 확립했고 인간을 생지(生知), 학지(學知), 곤지(困知)로 구분해 날 때부터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유가를 수용했다.

혈통을 중시하고 한번 결정된 계층을 유지하며 그 계층 간의 질서는 명령과 복종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려는 구조다. 이것을 질서라 생각하고 이 질서를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게 유가 학설이었다. 그에 비하면 유목문화는 능력 중심의 사회였다. 선우(單于)나 칸(汗)을 뽑는 방식은 농경사회보다 훨씬 더 능력 위주였다.

중화주의가 가장 강렬하게 나타난 건 남송(南宋) 시대다. 남송이란 북송의 휘종과 흠종 두 황제가 여진족의 금(金)에게 포로가 돼 망하자 휘종의 아들 조구(趙構)가 황제로 추대돼 북송의 계승자를 자처한 왕조다. 이제까지는 중원을 차지한 것으로 문화의 중심으로 자부했는데, 이제 그 문화의 중심지를 잃었으니 새로운 논리 개발이 필요했다. 이때 주희(朱熹)가 혈통주의적 역사관을 내세웠다.

중원 지역을 차지한 나라가 중심인 나라라는 논리를 버리고 어떤 혈통을 계승했느냐에 따라 문화적이냐 아니냐를 구분 짓는 역사관이었다. 따라서 금이 중원을 차지하고 문화적으로 우수하더라도 정통 왕조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란 관념을 만들어냈다. 혈통이 다른 북방민족과는 영원히 타협할 수 없다는 생각, 화이준별(華夷峻別)이다.

중원 지역의 주인은 한족인가? 중원이 비록 북방민족에 의해 정복돼도 중화 문화의 주인공인 한족이 정복자들을 교화해 그들을 화화(華化)시킨다는 논리가 있다. 무력으론 패했어도 문화만은 한족이 장악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한족은 혈통적으로 어떤 종족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후한(後漢)이 망하면서 북방민족과 한족의 경계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위(魏)·촉(蜀)·오(吳)의 삼국시대부터 뒤섞이기 시작해 한족과 북방 족의 혼혈이 이뤄지는 것이다.

북방 문화를 배격하며 순수 한족을 자칭한 사람들은 남쪽으로 내려간 객가족(客家族)이다. 현재 푸퉁화(普通話)라는 베이징 말은 영어로 mandarin이라고 하는데 이는 ‘만대인(滿大人, 만주 어르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말의 본거지는 베이징이 아닌 하얼빈이다.

한족이 중원의 주인이란 착시 현상은 왜 생겼나. 첫 번째는 주자학의 영향이다. 주자학의 화이론(華夷論)이나 중화주의는 실제가 아닌 주장이다. 주희가 쇠약해진 조국을 보며 꾼 꿈이다. 그런 주자학이 종교처럼 전파되면서 주자학에 훈도된 사람들이 중국인의 ‘꿈’을 실제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책으로서의 ‘25사(史)’다. 이른바 정사(正史)다. 이는 중원을 차지했던 왕조들의 역사를 모아놓은 것이다. 사실 아무 선후 연관 관계가 없이 쓰인 역사책을 한 줄로 세워놓고 그 위에 ‘정사’란 단어를 얹으니 착시 현상이 생기며 중원에서는 많은 왕조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한족 왕조는 한대(漢代) 이후엔 송과 명(明) 정도다. 몽골족의 원(元)이 어떻게 한족 왕조로 둔갑할 수 있나.

한족의 중국사란 인식은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중국사는 중원 지역을 지배한 무수한 종족의 역사로 봐야 맞다. 중원 지역은 고립된 곳이 아니기에 어느 특정 종족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중국 중심으로 아시아 역사가 진행됐다는 건 오해다. 중국사를 버리고 아시아적 시각으로 중원 지역을 보면 중원에서 일어났던 역사가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권중달

대만국립정치대학 문학박사. 중앙대 역사학과에서 30여 년 강의하며 중국유학사상사와 동양사학사를 연구했다. 『자치통감』 294권을 완역했으며 현재 요·금·송·원대 통사인 『속자치통감』 220권의 역주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권중달 중앙대 역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