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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거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73호 34면

묘비명

이윤정의 공감 대백과 사전

위키백과에서 찾은 유명작가들의 묘비명  
스탕달: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카잔차스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 여자의 사전  
그 여자가 젊었을 때 수없이 상상했으나 한 번도 현실에서 쓰지 못했던 수상소감의 실패를 딛고, 사후에라도 성공적으로 멋지게 남기고 싶은 그것.



여고시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성적에 집착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틈만 나면 우리를 붙들고 ‘학력고사 전국 수석 소감’연습을 했다. “나는 말야, 교과서로만 공부하고 일곱 시간씩 잤다, 이런 위선적인 말은 절대 안 할거야. 1년 365일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 1시까지 공부하고 수학의 정석과 성문종합영어를 열 번씩 떼고 무조건 암기 암기만이 살 길이라고 말할 거라고.”

하지만 야속한 운명의 여신은 친구에게 그렇게 되뇌었던 소감을 말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1등 한 번 못해보고 학교를 졸업한 친구는 그래도 늘 씩씩하게 살며 우리의 존경을 받았다. 아마도 어릴 때처럼 자신의 수석 소감을 언젠가 써먹을 때를 꿈꾸며 주문처럼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젊은 시절 한 때 영화를 만들겠다고 그 근처를 얼쩡거릴 무렵, 아카데미나 그래미 시상식 같은 걸 볼 때마다 나도 내 수상소감을 떠올렸다. 누구누구에게 감사하는 일은 과감히 생략해야 세련되겠지. 영화를 꿈꾼다는 것의 의미, 같이 꿈꾸는 사람들과 힘든 시간을 통과하는 일의 의미, 그리고 그 결과물이 대중과 소통하는 일의 환희, 내 꿈을 보며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뜻을 알차게 담자고 마음먹었던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던 때였다. 그러나 약간의 불행이라면 내 수상소감의 수정본이 머릿속에 쌓이고 쌓이도록 시간이 흘러도 시상식에 구경갈 일조차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된 뒤 가장 야심차게 준비했던 소감은 TV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아들이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오디션 결승전에 나가면 꼭 “물론 우승하기 바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우승을 하든 그렇지 않든 너는 나에게 영원히 자랑스런 아들이라는 걸 기억해달라.” 상상만 해도 눈물이 핑돌았다. 이렇게 엄마는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문제는 옆에서 눈만 껌뻑껌벅하며 시청자 투표할 준비만 하고 있는 아들이었다.

성공의 비결을 알려주는 글들을 보면 “이미 성공한 자신을 현실 속에 상상하며 행동하라”던데, 그러니 성공한 수상자의 감격은 이미 너무 많이 상상해서 외울 정도가 됐는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인터뷰를 할 수 있는데, 성공은 하필 내 현실에서만 왜 그리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건지.

그러다 작가 오르한 파묵의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을 보며 나의 치명적 약점을 발견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들, 친구들, 평범한 일상 내지 자질구레한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방에 가두고자 하는 자극이 필요합니다. 글을 쓰며 심오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시련,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성공을 꿈꾸며 현실에서 상상하고 따라해야 했던 행동의 지점은 수상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전, 성공한 사람들이 겪어낸 치열하게 인내하고 집중하는 그 시간들이었구나.

어쨌든 이제는 내 것이든 아들의 것이든 성공의 야심도 사그라지고 이미 허공에 흩어져버린 상상 속의 수상소감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이 탓일까, 요즘 신경이 부쩍 쓰이는 문구는 내 묘비명이다. 화장이 대세인 요즘이라 묘비를 세울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죽고 난 뒤 사람들은 나를 어떤 말로 추모해줄까 궁금하다.

그걸 떠올리니 정신이 번쩍 든다. 이렇게 살다가는 “하루하루 필사적으로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며 살아왔던 그 여자, 세상 뜨는 일만큼은 내일로 미루지 못하고 오늘 여기 잠들다”거나 “이 일 저 일 여러 곳에 내디뎠으나 결코 어디에도 깊숙이 담그지 못했던 그 여자의 발, 이곳에 아주 오랫동안 깊이 머물러 있으리라” 뭐 이런 묘비명만 남을 것 같다. 성공적인 사후의 묘비명을 위해서는 성공적인 수상소감을 위해 해야 하는 준비와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멋진 수상소감 남기는 데는 실패했으니 묘비명이라도…. 어쩐지 마음이 급해진다.

이윤정 :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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