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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경제 재생, 한 세대 걸려 … 대학·연구소·벤처 협력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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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호 07면

구조조정 이후 어떻게 해야 하나

“제조업이 망한 자리에 새로운 시작의 실마리가 있다.”

피퍼린넌 클리블랜드주립대 교수 #미 철강산업 중심지 ‘러스트 벨트’ #제조업 무너지자 자녀들 새 교육 #헬스케어 등 지식산업 도시로 변신 #서비스 산업은 소득 양극화 불러 #단기 처방일 뿐 좋은 대안 안 돼

 리치 피퍼린넌 미국 클리블랜드주립대 교수(도시경제)는 한국GM 사태 이후 군산 등의 지역경제 회생방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짐 러셀 교수와 함께 미국 제철소와 자동차 회사 등이 부실해진 이후 피츠버그·디트로이트·클리블랜드 지역경제의 변화를 추적했다. 세 도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출마와 당선을 계기로 유명해진 ‘녹슨 지대(Rust Belt)’에 속한다.

요즘 피츠버그 제철소 등은 어떤 모습인가.
“말 그대로 녹슬고 있다. 생산이 거의 되지 않고 있다. 남은 임직원들이 일하고 있지만 1950년대 활기찬 모습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디트로이트의 가동을 멈춘 자동차 공장 주변도 비슷한 모습이다. 주변 상가는 이제 자취를 감췄다.”

 

피츠버그나 디트로이트 도시는 그래도 유지되고 있다.
“(웃으며) 지역경제 구조가 바뀌었다. 피츠버그클리블랜드디트로이트는 50년대까지 미국의 실리콘밸리(성장엔진)였다. 그때까지 제철과 자동차 등이 경제의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식산업 도시로 변했다.”

 

아직도 녹슨 지대로 불린다. 한국에선 트럼프의 지지기반으로 통하기도 한다.
“(웃으며) 지난 대통령 선거를 보면 피츠버그클리블랜드 등 도시 지역에선 트럼프 표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젊은 층이 두껍게 형성돼 있다. 또 고학력층도 상당하다. 피츠버그를 예로 들면 이 도시 인구 가운데 석박사 학위 소지자가 17% 정도 된다. 미국 40대 도시의 평균은 15% 남짓이다. 학사학위 소지자도 27%로 다른 40대 도시 평균보다 높다. 트럼프의 주요 지지 기반은 녹슨 지대 가운데서도 농촌 지역이다. 녹슨 지대의 도농 격차가 크다.”

 

젊고 고학력인 사람들은 주로 어디서 일하고 있는가.
“헬스케어 연구센터와 관련 기업, 교육, 정보기술(IT) 등이 지역경제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0년대 이후 한 세대(25년) 동안 부활 과정을 거친 결과다.”

 

연방 정부와 지역에서 적잖은 복지와 경제부흥 비용을 지출했다. 하지만 좀체로 지역경제는 살아나지 못했다.
“제철소와 자동차 공장 등에서 일했던 나이 든 노동자들이 다른 기술이나 지식을 쉽게 흡수하지 못했다. 이들이 저항해서가 아니다. 한 직종에서 숙련공이 된 50~60대가 컴퓨터를 배우고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 자녀가 새로운 교육을 받고 지역경제의 중심이 됐다.”

 

교육이 부활의 매개체란 말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다. 하지만 대학 등 교육기관만으론 부족하다. 각종 연구개발(R&D) 센터와 관련 기업으로 이뤄진 생태계가 더 중요하다. 미국 서부의 스탠퍼드대가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성장을 이끈 것처럼 말이다. 스탠퍼드-IT 연구소-실리콘밸리로 이뤄진 트라이앵글이 IT 산업혁명을 낳았다.”

 

한국에선 제조업이 망한 자리에 관광 등 서비스 산업을 키우자는 얘기가 많다.
“단기적으로 나쁘진 않다. 그런데 제조업은 중간 소득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낸다. 반면 서비스업은 다수의 저임금 일자리와 소수의 고임금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경제가 양극화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서비스 산업은 훌륭한 대안이 아니다.”

 

장기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지식기반 산업이다. 피츠버그 등엔 많은 헬스케어 R&D 센터가 있다. 애초 헬스케어는 나이든 제철소 퇴직 노동자를 돌보기 위한 복지제도의 일환이었다. 오랜 세월 가혹한 조건에서 일한 제철 노동자들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자리마저 잃어 노동자 스스로 건강을 챙기기도 쉽지 않았다. 피츠버그시 정부는 연방정부 지원금 등을 합해 헬스케어 센터 등을 유치했다. 그런데 여기서 축적한 지식과 데이터가 헬스케어 관련 기업들이 추가로 들어서는 바탕이 됐다.”

 

나이든 노동자들이 떠나면 헬스케어 비즈니스도 침체하지 않을까.
“헬스케어 회사들이 요즘 싱가포르와 아랍에미리트(UAE) 등에 노하우와 시스템을 팔기 시작했다. 노령화가 심한 지역이 수출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쇠락한 산업의 잔해에서 새로운 성장엔진의 싹을 찾은 듯하다.
“맞다. 자동차 생산이 줄어든 디트로이트엔 크고 작은 자동차 디자인업체가 많이 생겨났다. 젊은이들이 아이디어와 재능만으로 기존 산업의 유산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 한국의 조선과 자동차 산업이 예전처럼 활기차지 않다.
“기존 조선과 자동차 산업이 남긴 것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게 좋다. 유산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대학과 R&D센터 등을 키워 관련 비즈니스가 싹 트도록 하는 게 좋다. 단, 이런 변화는 한 세대 정도 걸린다. 시간과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는 얘기다.”


리치 피퍼린넌
클리블랜드주립대 도시인구역동성연구소장이다. ‘녹슨 지대(Rust Belt)’의 경제, 인구, 여론 변화 등을 주로 분석하고 있다. 시카고 루스벨트대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뒤 클리블랜드대에서 도시설계와 경제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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