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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성조기 든 3만7000명, 태극기+한반도기 든 1500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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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태극기와 성조기 또는 태극기와 한반도기의 조합-.

3·1절 태극기 물결 속 두 풍경

3·1절 99주년을 맞은 1일 서울 도심 곳곳에서 여러 단체의 집회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 손에는 너나 할 것 없이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단체에 따라 태극기와 함께 다른 깃발이 나부꼈다. 보수·친박 성향 단체들은 성조기를, 진보 성향 단체들은 한반도기를 들었다. 지난해 ‘태극기’와 ‘노란 리본 달린 태극기’로 대표됐던 시위 주체의 정체성이 이번에는 성조기와 한반도기로 대체된 것이다.

기독교와 보수 진영에선 7개 단체 3만7000여 명이 집회에 참가해 세를 과시했고, 진보 진영에서는 12개 단체 1500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경찰은 추산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평창 겨울올림픽 때 북한 고위급 인사들의 방남, 남북 단일팀·북측 응원단 문제 등에서 대북 관계에 대한 진보·보수의 입장 차이가 현저히 드러났다”며 “양측은 이번 3·1절 집회에서도 깃발을 통해 ‘평화통일’과 ‘한·미 동맹’이라는 각자의 가치를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보수 “김영철 한국 땅 밟게 하다니”

대한애국당 등 보수단체 회원 7000여 명이 1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태극기집회’를 열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세종문화회관까지 행진을 벌였다. [뉴스1]

대한애국당 등 보수단체 회원 7000여 명이 1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태극기집회’를 열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세종문화회관까지 행진을 벌였다. [뉴스1]

보수단체는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광장(3·1절연합집회실행위원회)과 서울역 광장(박근혜 전 대통령 무죄석방본부)에서 잇따라 집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천안함 폭침의 배후로 지목받아온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평창올림픽 폐막식 참가를 허락한 정부의 결정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참가자 신모(30)씨는 “젊다고 모두 진보 정권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며 “김여정도 모자라 김영철까지 서울 땅을 밟게 하는 게 어딨나. 잘못된 대북·경제 정책으로 결국 피해 보는 층은 우리 같은 청년”이라고 말했다. 대전에서 오전 9시에 올라왔다는 송인숙(60·여)씨는 “나라가 이 지경이라 기도하러 왔다. 보수가 부패는 했지만 공산주의가 답은 아니다. 당선되자마자 어떻게 청와대에 종북 세력을 들이느냐”고 말했다. 이는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요직 중용을 지적한 것으로 해석됐다.

“잘못된 대북·경제 정책으로 피해”

일가족이 나온 경우도 있었다. 유모차 2대를 끌고 나온 회사원 김모(37)씨는 “대통령이 연설에서 고 신영복씨를 존경한다고 해 충격받았다. 이렇게 말할 정도면 심각한 종북이다. 적화통일이 될까 걱정이라 나왔다”고 말했다. 아내와 자녀 5명과 함께 나왔다는 유정선(52)씨도 “대학을 다닐 때 민주화 운동을 했는데 민주주의를 위해서였지, 지금 같은 사회주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20~30대로 구성됐다는 대한구국청년단은 구 일본대사관 주변을 람보르기니·에스턴마틴 등을 타고 도는 ‘수퍼카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이세욱(31) 대한구국청년단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죄를 주장하는 저분들은 진정한 우익이 아니다. 태극기는 박사모의 전유물이 아니다. 태극기의 의미가 변질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렇게 나왔다”고 말했다.

이날 진보 성향 단체들은 종로 탑골공원 인근에서 집회를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태극기와 함께 한반도기를 들었다. ‘반성 없이 되풀이되는 친일역사’라고 적힌 욱일승천기를 찢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진보 “하나 된 조국 만들어야”

이날 오전 겨레하나와 3·1민회 조직위 등 10개 진보단체 회원 300여 명은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극우단체로 오인당하는 게 싫다며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들고 3·1절 행사를 했다. [김정연 기자]

이날 오전 겨레하나와 3·1민회 조직위 등 10개 진보단체 회원 300여 명은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극우단체로 오인당하는 게 싫다며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들고 3·1절 행사를 했다. [김정연 기자]

집회 참가자 임재우(24)씨는 “일제시대에 해방 조국을 외친 걸 기념하는 날이 3·1절”이라며 “그땐 분단 조국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하나 된 조국을 만들자는 의미에서 한반도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윤태경(51)씨는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아직 외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며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만 들고 나온 경우도 있었다. ‘겨레하나’를 포함한 10개 단체 300여 명의 대학생들과 청소년들 손에는 한반도기만 들려 있었다. ‘대학생 겨레하나’의 김연희 집행위원장은 “99년 전에는 태극기를 들고 독립을 외쳤지만, 이제는 한반도의 평화와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면서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드는 것에는) 극우단체 영향도 있다”고 설명했다.

오후 4시 서울겨레하나 소속 참가자들은 구 일본 대사관 앞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진에 흙을 뿌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강제징용·침략지배 사죄하라’ ‘위안부 합의 폐기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극우로 오해할까 한반도기 들어”

광화문 광장 한편에 마련된 ‘3·1민회 조직위원회’(이하 3·1민회) 무대에 오른 함세웅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남과 북의 말이 같다는 것은 어머니가 같다는 것이다. 여유 있는 형제자매가 어려운 형제자매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도리다’고 말씀하셨다. 함께 평화를 지향하자”고 연설했다.

진보 시민단체들이 참여하는 3·1민회가 광화문 광장에서 집회를 열자 경찰은 인간띠를 만들어 보수단체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이때 일부 보수성향 집회 참가자들이 “이 빨갱이들아” “태극기 반대 집회야. XX XX들”이라고 소리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 때문에 경찰은 인간띠를 두 줄로 세워 충돌을 막았다.

오후 6시쯤 일부 보수단체 집회 참가자들이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10m가량 되는 세월호 추모 조형물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형물에 걸려 있던 노란 리본도 불태웠다. 일부는 ‘잘했다’ ‘만세’를 외쳤다. 사태가 물리적 충돌로 이어질까 우려됐으나 경찰 개입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조한대·여성국·김정연·권유진·정용환·정진호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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