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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난 당한 '어사 박문수' 가문 간찰 1000여점 찾았다

중앙일보

입력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기근이 들어 백성의 일이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바로 선비의 집안과 백성들이 날로 구렁에 빠져있습니다. 어르신께서 전라도 운봉 지역에 대한 보고서를 올려 조정에 들어간 뒤, 왕께서는 특별히 조사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우의정이 말하기를 이는 전라 관찰사와 더불어 상의를 해야할 것인데, 이렇게 보고를 올리니 남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임자년(1732년.영조 8년) 1월 14일, 막내 외삼촌 이경좌 올림.

2008년에 1047점 도난 당해 행방묘연 #매매업자 판매 시도 과정서 경찰에 덜미 #"박문수 재조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

조선 후기인 영조 8년. 암행어사 일화로 알려진 박문수(1691~1756)가 42세 때 일이다. 그는 외삼촌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는 대기근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현장을 둘러본 박문수는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가 시급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고, 이 소식을 들은 외삼촌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조선 후기인 영조 8년(1732년) 박문수가 외삼촌으로부터 받은 간찰(한문편지). 최규진 기자

조선 후기인 영조 8년(1732년) 박문수가 외삼촌으로부터 받은 간찰(한문편지). 최규진 기자

외삼촌은 박문수의 참담한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가족으로서 그의 안부를 걱정했다. 보고서가 지휘계통을 무시한 채 왕에게 직접 보고됐기 때문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를 향한 질투와 시기의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의 요청에 특명으로 화답했다. 박문수가 얼마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처럼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어진 인물이라는 점도 편지로 확인된다.

조선 시대 문인 박문수와 그의 후손들이 주고받은 이 같은 편지들은 10년 넘게 행방이 묘연했다. 2008년 8월 충남 천안 고령박씨 종중의 재실(齎室)에서 보관 중이던 간찰(簡札·편지) 1000여점이 도난당하면서다. 그러다 10년 만에 도난당한 간찰이 판매되는 과정이 경찰에 적발되면서 간찰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27일 박문수 관련 간찰을 숨겼다가 판매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김모(65)씨를 불구속 기소의견으로 송치하고 도난당한 간찰 1047점을 회수했다고 밝혔다.

27일 오전 서울 중랑구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브리핑룸에서 공개된 어사 박문수 가문 간찰. 최규진 기자

27일 오전 서울 중랑구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브리핑룸에서 공개된 어사 박문수 가문 간찰. 최규진 기자

경찰에 따르면 불법 문화재 매매업자인 김씨는 지난 2012년 한 장물업자로부터 간찰들을 사들여 충북 청주 자신의 집에 보관해왔다. 특히 김씨는 경찰수사가 시작되자 주변 매매업자들에게 정상적으로 문화재를 구입한 것처럼 허위 진술을 부탁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관계자는 “간찰에는 수신자가 ‘문수’(文秀)나 ‘영성군’(靈城君)으로 기재돼 있어 어사 박문수 가문 자료임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범행은 김씨로부터 간찰을 구입한 또 다른  매매업자 나모(70)씨가 국사편찬위원회에 합법적으로 간찰들을 매도하겠다고 신청하면서 드러났다. 경찰은 나씨가 간찰을 구매한 사실을 문화재청에 신고한 점 등에 비춰볼 때 김씨에게 속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감정에 따르면 이번에 회수된 간찰은 박문수가 활동하였던 1700년대를 중심으로 작성된 글과 현손(손자의 손자)이자 조선 헌종 때 암행어사를 지낸 박영보(1808∼1873) 등 후손들이 약 200여년간에 걸쳐 작성해 주고받던 것이다. 이 중 71건은 박문수가 18세기 가족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 소장은 “지금까지 신화적인 인물로만 알 수 있었던 박문수를 실존했던 인물로 사실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들이다”라고 평가했다.

도난당한 간찰 전부를 돌려받은 박문수의 후손인 고령 박씨 문중은 이를 천안 박물관에 전부 위탁기증할 계획이다. 박문수 어사의 8대손인 박용우(71)씨는 “검거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떨리고 화가 났다. 그동안 저희 후손들이 못나서 제대로 보관을 못했기 때문이라 자책했다"고 소회를 전했다.

최규진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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