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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의 금융산책] '난폭운전자'에서 '주얼리'로…임기 중 마지막 금리 결정 이주열 한은 총재의 4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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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재임중 마지막으로 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밝은 표정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재임중 마지막으로 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밝은 표정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밝았다. 시종일관 미소를 띠었다. 임기 중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마지막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의사봉을 두드리며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활짝 웃었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기준금리 동결이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27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 1.5%로 동결했다. 지난해 11월 30일 금리를 0.25% 포인트 인상한 뒤 3개월 연속 동결이다.

 이번 금통위가 그의 마지막 회의는 아니다. 다음 달 열리는 금융안정 관련 회의가 의장으로서 주재하는 마지막이다. 그렇지만 금리 결정은 이번이 끝이다. 이런 변화는 그가 만들었다. 좀 더 긴 안목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연 12회이던 금리 결정을 지난해부터 연 8회로 줄였기 때문이다.

 금통위 직후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도 편안한 모습은 이어졌다. 평소보다 답변에 여유가 넘치는 듯했다. 또박또박하고 느릿하면서도 간결한 화법은 그대로였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27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재임 중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를 마치고 통화정책 방향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27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재임 중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를 마치고 통화정책 방향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관망 주열’ … 정통 ‘한은맨’으로 신중하고 간결한 발언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이 된 1998년 이후 이성태 전 총재에 이어 한은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총재직에 오른 그는 통화신용정책 전문가다. 조사국장과 정책기획국장 등을 역임하며 수치에 정통하다. 팩트 위주로 전달한다. 때문에 그의 화법은 지나치게 신중하고 무미건조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임 한 금통위원은 “실무를 담당했던 정통 ‘한은맨 ’답게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고 팩트를 말하는 것이 체화돼 있다”며 “의장으로서 다른 위원의 말을 충분히 새겨듣고 최대공약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경제 지표에 근거한 수치와 사실 위주로 발언이 흘러가다 보니 문맥과 이면의 의미를 분석하려는 ‘한국은행 워처(BOK Watcher)’ 들에게는 해석의 여지가 넓지 않았다는 평가다.

 특유의 신중한 태도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혹은 “주시하고 있다”는 언급을 많이 해 ‘관망 주열’로 불리기도 했다. 총재의 발언에 시장이 과민하게 반응하는 ‘중앙은행의 선언효과(announcement effect)’를 의식한 탓으로도 풀이된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이 총재의 말은 계량경제학자처럼 군더더기 없는 ‘절약형 발언’이라며 그런 면에서 ‘Mr. Economy’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타고난 달변가였던 박승 전 총재나 비유나 은유적 표현을 즐겼던 이성태 전 총재, 이론 등을 자주 인용했던 김중수 전 총재와도 다른 면모다. 정책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모호한 표현으로 시장과의 기 싸움을 즐겼던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과도 사뭇 다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27일 임기 중 마지막으로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했다. 이날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연 1.5%로 동결했다. 사진은 이 총재가 2014년 7월 10일 금통위 전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27일 임기 중 마지막으로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했다. 이날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연 1.5%로 동결했다. 사진은 이 총재가 2014년 7월 10일 금통위 전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난폭 운전(?)’…임기 초 ‘금리 깜빡이’ 잘못 켜며 시장과 불통

 신중하지만 때로는 소극적으로 보이는 그의 발언과 태도는 연이어 금리를 내렸던 임기 초 시장과의 소통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 총재는 지난해 11월 기준금리를 올리기 전까지 임기 중 다섯번 금리를 내렸다. 기준금리는 사상 최저수준인 연 1.25%까지 떨어졌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등으로 경기가 위축된 데다 양적완화에 나선 주요국 중앙은행의 틈바구니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문제는 ‘금리 깜빡이’가 제대로 작동된 적이 없다는 데 있었다. 시장에 반대 신호를 준 채 금리를 내리거나 예상치 못한 시점에 금리를 인하해 신호와 반대로 핸들을 꺾거나 신호 없이 차선을 옮기는 일이 반복된 것이다.

 의도치 않게 이 총재가 ‘난폭 운전자(?)’가 된 셈이다. 2014년 4월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통화정책을 펼칠 것”이란 취임 일성과는 어긋나는 행보였다.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그는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한은 총재 청문회에서 확인해야 할 주요 덕목은 “교통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겠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장 관계자는 “당시 국내와 대외 상황을 고려하면 금리를 인하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총재가 억지로 금리를 내리는 듯한 느낌을 줬고, 그래서 시장이 당혹스러워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초이노믹스’…잇따른 금리 인하로 가계부채 급증 야기 비판도

 지난해 10월 한국은행 국감장에서도 이 논란은 재점화됐다. 포문을 연 것은 이혜훈 바른정당 의원이었다.

 이 의원은 “이주열 총재는 박(근혜) 정부 사람이냐, 문(재인) 정부 사람이냐”며 “취임당시 2.5%였던 기준금리가 1.25%로 반 토막이 됐다. 소신을 못 지키고 왜 거꾸로 갔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세월호 사건 당시 유일하게 금리 인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뒤 ‘척하면 척’ 발언 때문에 시끄러워지고 소신대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취임 이후 한은이 금리 인하를 지속한 것에 대해서는 “정부에 무릎 꿇은 것”이라고 했다.

 최 전 부총리가 2014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이 총재와 만난 뒤 “금리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척하면 척 아니겠냐”고 말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발언 이후 한 달 만에 한은이 금리를 인하하면서 의혹은 더 커졌다.

 이른바 ‘척하면 척’ 발언은 그에게 원죄처럼 따라다니는 족쇄와도 같다. 경기부양을 위한 ‘초이노믹스’에 발맞춰 금리를 인하한 탓에 부동산 과열과 가계부채의 급격한 증가를 부추겼다는 비판도 받는다.

지난해 말 가계부채는 1450조원을 돌파하며 한국 경제의 불안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중앙은행 독립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그에게 세간의 이런 오해는 아픈 부분이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선제적인 대응에서 부족한 측면이 있지만 경기 부진 상황에 완화적 통화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며 “여전히 물가가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경기가 나아지는 등 전반적으로 무난했다”고 말했다.

 이 총재도 지난해 국감에서 “그동안의 저금리 정책이 경기회복 모멘텀을 살리는 데 분명히 기여했다”는 견해도 밝혔다. 실제로 2015~2016년 2%의 저성장 덫에 걸렸던 한국 경제는 지난해 3.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주열 한국은행총재가 27일 한국은행에서 열린 임기 중 마지막으로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해 밝은 표정으로 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주열 한국은행총재가 27일 한국은행에서 열린 임기 중 마지막으로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해 밝은 표정으로 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주얼리’ …“중앙은행 발권력 지키기 위해 직을 걸겠다”

 ‘주얼리(Jewelryㆍ보석)’는 이 총재의 별명이다. 이 총재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쓴 ‘주열 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조직 내부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신망도 얻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4년 전 한은 총재 내정 당시 전임 김중수 총재의 개혁으로 상처받았던 한은을 추스를 수 있는 인물로 환영받았던 이유기도 하다. 중앙은행의 독립을 지키는 데도 그의 이런 면모가 드러났다.

 사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언제나 위태롭다. 경제가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울 때 정부나 정치권을 중앙은행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돈을 찍어내는 중앙은행의 힘, 발권력에 기대기 위해서다. 총재의 입장에서 이는 꼭 지켜내야 할 중앙은행의 ‘보물’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2016년 ‘한국판 양적완화’ 논의 속에 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한 펀드 조성에 한국은행이 출자하라는 전방위 압박이 쏟아졌다. 구조조정에 필요한 ‘실탄’을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서 대라는 셈이었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윤전기를 동원해 경기 부양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시절이다.

 당시 그가 “(한은 총재) 직을 걸고 막는다”고 선언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자본확충펀드에 참여했지만 출자 대신 대출 방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석에서 그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재정 대신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발권력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수호한 그는 외환 안전망도 튼튼하고 단단하게 짰다.

 지난해 10월 한ㆍ중 통화스와프 연장 합의를 이끌어 낸 데 이어 지난해 캐나다와 무제한ㆍ무기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이달에는 스위스 중앙은행과 100억 스위스 프랑 규모의 3년 만기의 통화스와프를 맺었다.

외환보유액과 함께 2선의 외환 방패막이 역할을 할 통화스와프 안전망을 촘촘하게 짠 것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 통화신용정책 담당 부총재보로 일했던 경험 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4년간 ‘한은 호’를 이끌어 온 그의 긴 여정이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소회를 아껴둔 그는 앞서 “임기 내 마무리 지을 건 확실하게 해 후임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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