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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비밀접촉 잘못하면 뒤탈…김영철 방한에 반면교사 삼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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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25일 오후 2018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 관람을 마친 뒤 진부역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25일 오후 2018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 관람을 마친 뒤 진부역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방한을 이틀 앞둔 23일 통일부는 설명자료를 내고 그가 “현재 북한에서 남북 관계를 총괄하는 통일전선부장으로서 남북관계 개선과 비핵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책임 있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천안함 폭침 당시 정찰총국장이었던 그가 현재는 통일전선부장으로 남북 관계의 열쇠를 쥔 ‘키맨’이기에 논란이 있더라도 방한을 수용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정작 25~27일의 김영철 방한 기간 우리측 정부 당국자들과 구체적으로 어떤 협의를 했는지에 대해선 정부는 말을 아끼고 있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북한의 핵심 인사와 주요 협의가 이뤄졌는데 정부는 이 내용을 국민에겐 최소로 공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익명을 원한 전직 정보당국 관계자는 “김영철을 한국 땅에 데려와서 국민 모르게 물밑 접촉을 벌이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우려했다.

김영철이 한국 땅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담긴 사진조차 찾기가 어렵다. 지난 25일 경기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CIQ)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과 당일 저녁 8시 평창 겨울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하고 이동했던 장면 이외엔 공개된 현장도 없다. 일정도 최소한만, 그것도 대부분 사후에 공개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26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오찬을 마치고 호텔을 나서고 있다. 장진영 기자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26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오찬을 마치고 호텔을 나서고 있다. 장진영 기자

해빙기 문턱에 있는 현재의 남북 관계를 고려할 때 김영철은 직책상 우리측 정부 당국자들과 깊이 있는 협의를 했을 것이라는 관측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또 남북 관계의 특성상 비선(秘線) 접촉 또는 비공개 회담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처럼 김영철의 동선과 일정을 가리기로 일관해선 곤란하며 과거 섣부른 물밑 접촉이 뒤탈만 불렀던 사례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 당시 물밑 접촉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무리수를 두다 북한이 2011년 6월 일방적으로 이를 공개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북한은 국방위원회 대변인 명의로 입장을 내고 “남측이 정상회담 개최를 빨리 추진하자고 하면서 돈 봉투까지 거리낌 없이 내놓고 유혹하려고 꾀하다 망신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북한 주장에 따르면 그해 5월 9일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 비밀 접촉이 열렸으며 통일부 김천식 통일정책실장, 국가정보원 홍창화 국장, 청와대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 등이 남측 참석자였다. 이에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졌고 ‘돈 봉투 구걸’ 의혹을 불렀다.
이에 앞선 2009년에도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이 그해 10월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통전부장을 비밀리에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논의했다고 일본 NHK 방송을 통해 보도해 이명박 정부가 겉으론 대북 원칙론을 내걸고 이면에선 비밀 접촉에 몰두한다는 비판을 불렀다.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10년 10월 12일 임태희 대통령 실장(왼쪽), 정진석 정무수석이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10년 10월 12일 임태희 대통령 실장(왼쪽), 정진석 정무수석이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중앙포토]

박근혜 정부는 남북관계에 있어서 비선 라인을 가동하지 않겠다며 투명성을 강조했지만 역시 물밑 접촉으로 논란을 자초했다. 지난 2014년 10월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을 비공개로 진행했다가 거짓말 논란까지 불거졌다. 당시 야당에서 해당 접촉의 시간과 장소까지 공개했음에도 국방부와 통일부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만 발표했다. 통일부는 그해 10월13일 북한에 고위급 남북 접촉을 30일 판문점에서 개최하자는 통지문을 보내놓고도 임병철 통일부 대변인은 당일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에 제의할 내용에 대해 현재 검토 중에 있어서 정확한 것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다른 얘기를 해 비난을 받았다. 남북 간 비밀 접촉이 정부로서는 편리할 수 있으나 화를 부를 수 있는 양날의 검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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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김영철 방한을 두고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김영철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만큼 신변 보호 문제가 있었고, 우리 정부가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만큼 정부가 조심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하면 의구심만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남북 관계는 이제 남북 당국뿐 아니라 국민 여론, 국제사회와 함께 움직여야 하는 문제”라며 “지금처럼 비공개로 일관하는 것은 우리 정부에게도 좋지 않다”고 조언했다. 익명을 원한 전직 정보당국 관계자는 “남북 관계에서 비공개 접촉은 오히려 자충수가 될 수 있다”며 “물밑 접촉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잘못되면 그 후유증은 엄청나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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