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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설영의 일본 속으로] 여심 뺏은 남장 여배우 … 관광객 117만 줄서는 22만 도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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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여성으로만 이뤄진 다카라즈카 가극단 이 ‘부케 드 다카라즈카’ 공연을 하고 있다. 이들의 공연은 10년간 계속 만석을 기록하며 ‘연극계의 기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 다카라즈카 가극단] ⓒ宝塚歌劇団

여성으로만 이뤄진 다카라즈카 가극단 이 ‘부케 드 다카라즈카’ 공연을 하고 있다. 이들의 공연은 10년간 계속 만석을 기록하며 ‘연극계의 기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 다카라즈카 가극단] ⓒ宝塚歌劇団

도쿄에서 약 500㎞. 도쿄역에서 신칸센과 JR열차를 2번 갈아타고 3시간 반을 달리면 효고현(兵庫県) 다카라즈카시(宝塚市)에 도착한다. 인구 22만명의 작은 도시인 다카라즈카시는 오사카(大阪)에서 전철로 30분 거리에 있는 베드타운이다. 하지만 이 곳엔 매년 117만명에 이르는 관람객이 각지에서 몰려든다. 오로지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105년 전통 여성가극단 ‘다카라즈카’

다카라즈카역에 내리자 마치 중세 유럽의 소도시에 온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옅은 주황색 벽돌의 건물과 대극장까지 이어진 ‘꽃길(花のみち)’이 무대의 한 장면처럼 어우러졌다. 커피숍과 식당 등 상점가에도 다카라즈카 배우들의 사진이 빠지지 않고 전시돼 있었다.

다카라즈카시 관광기획과 모리조에 야스유키(森添泰行) 과장은 “가극단의 예술성이 시의 독자적인 이미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면서 “공연을 보러 여러 번 찾는 관광객들이 많아, 6번 이상 봤다는 관객도 많다”고 말했다.

다카라즈카 가극은 1914년 오사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철도회사인 한큐(阪急)전철의 창업자 고바야시 이치조(小林 一三)가 관광객 유치 방안으로 고안했다. 당시 오사카에서 남성 가극단이 큰 인기를 끌자 정반대 컨셉으로 “여성으로만 구성된 가극단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던 것.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12~17세 소녀들이 무대에 섰던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다카라즈카는 전원 미혼 여성만으로 구성된 가극으로 자리잡게 됐다.

매일 ‘톱스타’ 만나려는 팬들의 행렬

다카라즈카 극단

다카라즈카 극단

다카라즈카는 한마디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문화콘텐츠다. 출연하는 배우가 모두 여성일 뿐아니라 이들의 팬들도 거의 99%가 여성이다. “여성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남성상을 여성이 연기한다”는 점에서 팬들은 매력을 느낀다.

지난 22일 오전 8시 30분. 다카라즈카 대극장의 뒷편 출입구. 공연까지 아직 3시간도 넘게 남은 시각인데도 여성팬들 20여명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배우들의 실물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고 이른 아침부터 나선 것. 도쿄에서 온 30대 직장인 구보타 사나는 “배우들을 직접 보고싶어서 유급휴가를 내고 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게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잠시 후 챙이 넓은 모자를 쓴 ‘톱스타(남자 주인공 역할의 배우를 가리키는 용어)’로 보이는 듯한 배우가 나타났다. 그의 뒤로는 2줄로 나란히 선 여성팬들 20여명이 그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팬들은 문 앞에서 팬레터와 선물, 도시락 등을 건낸 뒤 마지막으로 “잘 다녀오세요”라며 인사를 한다. 톱스타가 손을 흔들며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출근 세리머니’가 끝난다. 이런 풍경이 오전 9시를 전후로 매일 펼쳐진다.

이상적인 남성상 연기 … 신원 베일에

다카라즈카

다카라즈카

남자 역할을 하는 ‘오토코(男)역’의 배우는 마치 순정만화 속 남자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날카로운 턱선과 과장된 눈 화장, 어깨까지 드리운 머리칼이 전형적인 모습이다. 다리가 길어보이게끔 제작된 의상과 대사나 행동도 만화 속 남자들과 빼닮았다.

대학생 나나(20)는 “오히려 여자가 남자를 연기하기 때문에 실제 남자에게는 없는 아름다운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여성을 연기하는 ‘무스메(娘)역’의 배우는 “단원 전원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돋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좋다”(마오리·20·대학생)는 설명이다. 가극은 연극과 노래, 춤이 섞여있어 뮤지컬과 비슷하면서도 화려한 무대가 특징이다.

배우들은 철저한 스타 시스템을 통해 육성된다. ‘스미레(제비꽃) 코드’라는 규율을 통해 신비주의 컨셉으로 관리된다. ‘오토코 역’의 배우는 공연장 밖에서도 바지만 입고 남자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마찬가지로 ‘무스메 역’의 배우는 치마만 입을 뿐더러 어디서건 여성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게 불문률이다. 연애도 사실상 금지하고 있다. “팬들이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게 가극단 측의 설명이다. 일본의 아이돌 시스템이 다카라즈카의 규율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매년 3월이 되면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려는 여학생들이 시로 몰려든다. 매년 40명씩 선발하는데 지난해엔 26.1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을만큼 치열하다. 학생들은 2년간 춤과 노래, 연기 등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스타를 꿈꾸지만 모두가 스타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지역에서 20년 가까이 호텔을 운영해온 A씨는 “어렵게 학교에 들어가서도 경제적인 이유로 그만두는 배우들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일부 스타 배우를 제외하고는 고졸 수준의 연봉을 받는 걸로 안다. 7년 내에 톱스타로 선발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 그만 두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결혼하면 탈퇴 … "구시대적” 비판도

다카라즈카가 폐쇄적이라는 지적도 계속돼왔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등 소재가 여성 취향에 한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다. 일본 특유의 남장여자를 좋아하는 소녀 문화의 일부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카라즈카시의 한 주민은 “팬클럽 단위로 관람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표를 구하기 어려워 초심자들에겐 문턱이 높다. 대중적으로 확산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배우가 결혼을 하면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점도 시대상에 뒤쳐진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도 다카라즈카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최근 10년간 객석 가동률이 거의 100%를 기록하고 있다. 통상 연극의 객석 가동률이 70% 수준인 것에 비하면 “연극계의 기적”이라는 평가다. 다카라즈카 전문 위성채널이 있을 정도다. 가시하라 마유미(柏原真由美) 티켓센터 담당은 “최근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공연을 내놓으면서 남성 관객도 늘었고 외국인 관객도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윤설영 효고현 다카라즈카=도쿄 특파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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