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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 문학

한 해 늦은 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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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형중 조선대 교수·문학평론가

김형중 조선대 교수·문학평론가

‘압축적 근대’를 겪어야 했던 한국소설은 건너뛰고 누락한 것들이 많다. 가령 ‘교양’(Bildung)을 찾기도 힘들고 ‘세계 텍스트’도 찾기 힘들다. ‘부르주아’도 그중 하나다. ‘소설’을 발명했고 세계소설사상 최고의 걸작들을 탄생시킨 계급이 전성기 부르주아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다. 그러나 거슬러 내려가면 염상섭이나 찾아질까, 엄밀한 의미에서 ‘부르주아적인 소설’이 한국문학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정미경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이 등장했을 때, 기대가 컸던 것은 그런 이유다. 풍속적이면서도 성찰적인 소설. 그의 시야는 속물적인 한국자본주의의 구석구석까지 미쳤고, 욕망과 윤리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까지 가 닿았다. 기대가 헛되지는 않아서 ‘아들과 연인’계열의 이례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작품들을 써냈고, 그렇게 한국 소설사의 ‘누락분’을 메워갔다. 그는 ‘반드시 필요한’ 작가였다.

지난해 1월 세상을 떠난 소설가 고 정미경과 유고작인 장편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사진 아래). 또다른 유고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도 최근 나왔다. [중앙포토, 문학동네]

지난해 1월 세상을 떠난 소설가 고 정미경과 유고작인 장편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사진 아래). 또다른 유고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도 최근 나왔다. [중앙포토, 문학동네]

당신의 아주 먼 섬

당신의 아주 먼 섬

그러나 느닷없는 죽음은, 이승에서 어떤 존재가 차지하는 ‘필요성’의 정도를 고려하지 않는 듯싶다. 그가 돌연 세상을 등진 것이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2017년 1월 18일의 일이다. 병을 안 지 한 달 만이었고, 입원한 지 사흘 만이었다고 한다. 그랬으니 최근 출간된 “작가 정미경의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유고작”(작가의 남편 화가 김병종)인 『당신의 아주 먼 섬』에서 작가의 유언을 읽어내려는 짓은 살아 있는 독자의 감상에 불과할 것이다. 정미경 최후이자 최고의 작품이라거나, 작가 자신도 예감하지 못한 죽음을 작품이 미리 예감하고 있었다는 식의 과장도 삼갈 생각이다.

다만 이 작품이 정미경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란 말 정도는 해도 되겠다. 특히 소설 말미, 소금창고 도서관 개관식에 맞춰 섬마을 전체에 번지는 그 “신비한 네트워크”의 달뜬 분위기가 황홀하다. 그러나 오늘은 한 해나 늦은 조사를 자발적 벙어리 소년 판도가 반복해서 읽던 문장 하나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겠다. “내게 실제 일어난 일은 거의 없고 나는 많은 일들을 읽었을 뿐입니다.”

절과 절 사이에 “당신으로 하여”란 말만 덧붙인다면, “기억할 가치가 있는” 많은 일들을 읽게 해 주었으나 너무 일찍 떠나버린 작가에게 바치는 말로는 참 적절하다.

김형중 조선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