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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샷] 뱃속 아이와 가방 2개 들고 내린 시드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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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 컷(47) 이순미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공부는 6학년 때 특별한 계기로 하게 된 것 같다. 어쩌다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그분께 더 사랑받기 위해 시험 때면 조그만 밥상 위에서 시험공부를 한 기억이 난다. "너희들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해" 그 선생님이 늘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었다.

학창시절 반에서 1~2등은 아니었다. 그 흔한 학원도 한번 다니지 못하는 형편이었지만 남들 가는 대학에 가고 싶었다. 아버지가 나이가 너무 많으셨기에 막내 남동생의 학비는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었다. 그러기 위해서 여자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을 갖고 싶었다. 그 당시 여자가 할 수 있는 직업 중 선생님, 간호사(의사나 약사는 실력이 되지 못했다)가 될만한 곳을 골라야 했다.

고2 때 우리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IT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다. '여자라도 IT를 공부하면 직장을 잡을 수 있어'라는 말에 알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분야이지만 그곳에 가기로 결심했다. 학교를 알아보니까 중앙대학교가 있었다. 부모님이 사립대에 등록금을 내줄 형편은 아니었기에 간호 전문학교와 비교하며 많이 고민했었다. 부모님은 2년제 간호 전문학교에 가기를 바라셨다. 철도 간호전문대 입학원서를 받아오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내가 첫 학기 등록금은 내줄 테니 그다음부터 네가 알아서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대학공부를 해라"고 말씀하셔서 중앙대에 입학원서를 내고 합격했다. 입학 후 학비 조달을 위해 과외, 학보 편집, 앙케트 조사하는 알바 등을 했다. 전액은 아니지만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은행으로부터 등록금을 대출받으면서 4년제 대학을 내 힘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총무처 정부전자계산소(GCC)에서 7급 공무원 시험이 있다는 말을 조교로부터 듣고 시험을 치렀다. 당시 과에서 제일 처음으로 직장을 잡았다. 이렇게 나의 IT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사진은 내가 호주 오기 바로 전인 1983년에 찍은 사진이다. 막냇동생(우리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한의대 입학식에 이모와 엄마, 그리고 3자매가 조카와 축하해 주러 모였다. 그때 큰언니는 미국 시카고에서 살고 있었다. 막냇동생은 졸업 후 한의사가 되어서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부양한 효자다.

1984년도만 하더라도 해외여행이 자유화가 되지 않아서 신혼여행 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봤다. 이후 남편과 함께 첫 아이를 뱃속에 품고 시드니로 향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젊음 하나 붙들고 20대의 나이에 이민 길에 오른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시드니까지 직항이 없어서 홍콩을 경유해 시드니로 갈 수 있었다.

홍콩에서 시드니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많은 백인이 앉아있는 게이트로 왔을 때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 두려움은 미지의 땅에서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이들과 마주칠 우리의 앞날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영어라곤 고작 읽고 쓰고, 영어로 대화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정도의 실력뿐이었다.

부모·형제를 두고 떠나는 이민이었기에 미안한 마음에 겨우 1년 썼던 신혼살림 모두를 한국에 나누어 주고 가방 2개 들고 시드니에 내렸다. 냉장고와 침대, 오래된 중고차를 사니 돈이 바닥났다.

이 사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만 살아계실 때, 미국에 있는 언니와 호주에 사는 내가 한국을 방문해서 엄마 집에서 찍었다. 아래 줄에 미국에 사는 큰언니, 작은 언니, 막내 남동생이고 윗줄에 여동생, 엄마 그리고 내가 찍혔다. 이제 아들, 딸이 다들 결혼하고 나니 옛날 좁은 공간에서 부딪혀 살던 내 형제자매가 점점 그리워진다.

1984년 7월에 호주 시드니에 도착해서 12월에 첫 딸을 출산했다. 산후조리하러 엄마가 오셨는데, 내가 아이 키우느라 직장을 못 잡을 것 같으시다며 두 달 된 아기를 데리고 가시겠다고 하셨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다니던 교회 어른들의 조언과 설득으로 우리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딸을 보내 놓고 영어를 배우며 일을 찾기 시작했다. 영어를 못해 겪었던 한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이력서를 들고 IT 직업을 소개하는 에이전트를 찾아갔다. 인터뷰하던 직원이 이력서를 복사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는데, 안된다고 대답했다.

카피(copy)와 커피(coffee)를 분간을 못 해서 '노 땡큐(No Thank you)!'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물어보는 사람의 표정이 이상해서 금세 알아차렸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이제는 눈치 백단이 되었다. 그분이 아기를 밴 나의 배와 형편없는 영어 실력을 보고 집에 가서 애 낳고 영어공부 더하고 나중에 오라고 돌려보냈다.

첫 직장에서 인터뷰할 때는 부가 의문문으로 물어보는 데 또 반대로 대답하고는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의아한 얼굴을 마주 봐야만 했다. 다행히 그곳의 매니저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나 같은 실수를 많이 한 일본 유학생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주며 웃고 넘어가서, 그곳이 나의 첫 직장이 되었다.

직장에 입사는 했지만 여전히 현지인들과의 대화는 어려워서 팀 미팅을 할 때마다 입을 꾹 닫았다. 어느 날 드디어 내 입이 열리고 무엇인가를 표현하려 했을 때, 모두 손뼉을 쳐주며 격려해 주었다.

그곳에서 4년을 일하고 지금의 직장인 호주중앙은행(Reserve Bank of Australia)에 옮겨왔다. 은행 업무를 개발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IT가 호황을 이루고 있었기에 짧은 영어 실력이었지만 대우받으며 지냈다.

최근 들어 지금 일하는 은행에서 IBM 대형 컴퓨터시스템을 소형컴퓨터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있다. 2019년 11월 완공을 목표로 재개발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 그래서 2019년 11월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이민 오느라 몇달을 쉬었고, 둘째 낳고 산후조리하느라 석 달을 쉬고, 현재 38년째 일을 하고 있다.

2011년 아이들과 찍은 사진이다. 이것이 우리 가족 4명만 함께 찍을 수 있었던 마지막 사진이었던 것 같다. 다들 결혼하면 각자의 가정생활에 충실해야 하니까. 딸과 아들은 의사로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공부를 최상위로 하지는 못했지만, 의사로 봉사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기뻐하셨는지 기회를 주신 것 같다.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로 바쁜 딸과 아들이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모여 주었다. 잘 성장해준 딸과 아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국세청에 실습을 나가서 그곳에서 다른 대학교에서 실습 나온 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고 그가 나의 남편이 되었다. 그는 ROTC를 마치고 삼성에 입사했다. 결혼 후 직장을 옮기면서 연구원으로 대덕 연구단지에서 근무했고, 우리는 주말 부부가 됐다. 내가 GCC를 들어간 지 4년이 되는 해에 우린 젊음만 갖고 기술이민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진은 작년 결혼 34주년을 맞이해서 스페인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34주년을 기념하며 상그리아를 마시고 있다. 4월 24일이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다. 올해는 결혼 35주년과 나의 환갑이 겹치는 뜻깊은 한 해가 될 것 같다.

나는 손자와 손녀 3명 반(또 한 명이 올 6월에 출산 예정이다)을 둔 행복한 할머니다. 사진은 지난 크리스마스 때 트리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제일 어린 손녀딸 4개월 된 은희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 왼쪽 3명이 딸 가족, 오른쪽 3명이 아들 가족, 뒤에 2명이 남편과 나다.

이곳 남반부에서 크리스마스는 무더위 속의 여름철이다. 호주에 처음 와서는 여름 크리스마스에 익숙하지 못했는데, 이제 34년이 지나고 나니 차츰 익숙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하얀 크리스마스가 그리울 때가 있다.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감사할 게 너무나 많은 삶이었던 것 같다. 이민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잘 견뎌 냈고, 특히 자녀들이 성실하게 잘 자라 준 것에 감사한다. 그동안 나를 위해 너무도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제 앞으로의 여생은 주위를 돌아보며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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