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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동방의 명주" 경박호풍광 아름답기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목단강시 처제집에 유숙하고 있는 동안 조석으로 그 부근 동네에 혼자서 산보를 나갔다. 이 동네에는 각종의 「판덴」(반점·음식점)과 「찬팅」(찬청·식당)등이 많고, 길가에는 「멘보우」(면포·중국빵) 「유탸오」(유조·튀김떡) 「쎌빙 (이아병·소를 넣어 구운 떡)등을 파는 노점상도 많아 이것저것 사먹으면서 50여년 전의 학생시절을 회상해보곤 했다. 음식점 중에는 「민주펑웨이 판덴」(민족풍매반점) 「스팡렁멘관」(시방냉면관)등 우리 교포가 경영하는 음식점도 있어 가끔 이곳을 찾아 일하는 우리 종업원들과 대화하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었다.

<개방후 수리공자생>
또 큰길 「꽝화따제」(광화대가) 네거리 근처에는 매일 자전거 수리공, 구두 수리공, 우산 수리공등 많은 날품팔이 「꿍런」(공인)들이 즐비하게 앉아서 일하는데, 이들은 개방 전에는 개인영업이라고 금지했다가 개방 후에 이같이 자유업을 허가해주어 굶지않고 살게 되었다고들 했다.
이들 수리공 중에는 여자 공인도 많았다. 역시 큰길에는 자전거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또 촌에서 각종 짐을 싣고 들어오는 트럭과 수박·채소등을 싣고 들어오는 당나귀 수레도 많다. 이들 지나가는 남녀의 옷차림은 그저 수수하고 털털해 매우 검소한 편이었다. 혹 우리 내외가 택시를 기다리느라고 길가에 서있으면 지나는 사람들은 으례 한두 번씩 우리모습을 흘금흘금 보곤 했다. 그러나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혼 대개 교포끼리>
목단강시에 한 달여 체류하고 있는 동안 10여 차례나 교포·친지들의 초대를 받아 그들의 집을 방문해 식사와 담소를 즐겼다. 이들은 대개 공장단위의 층집(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생활수준은 전부(공장간부까지) 평등하게 살고 있으며 이미 조부대 또는 부모대에 이민해온2∼3세 교포들이었으므로 중국국적에다 중국말을 우리 나라 말보다 더 잘했다. 결혼도 특별한 경우(한족과 사귀는)외엔 반드시 우리 민족끼리 한다고 했다.
또 서장안가에 있는 목단강교회에 나가 여러 동포 교인들을 만났는데 서울에서 왔다고 너무 반가와 교인 전부가 한명 한명 우리 손을 붙잡고 인사하면서 서울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다.
어느 날 시내 「아이민졔」(애민가)에 있는 목단강 도서관과 문화궁을 찾았다. 문화궁은 회색의 3층집인데 2층의 전시실로 올라가니 한 중국인 화가의 족자로 된 산수·화조화가 걸려 있었다. 시내에는 이같은 문화궁이 대개 직장마다 있는데 여기서 일본·미국·멕시코및 동구권 나라들의 영화와 연극·무용·음악등이 공연되어 공인들에게 레크리에이션시간을 갖게 한다고 했다.

<길거리에 참외장사>
8월30일 일요일, 처제 부부와 같이 교포문화원이 매년 주최하는 「목단강지구 제4기 조선민족 로인절 경축대회」에 가보았다. 이 대회는 목단강시외 「테링샹」(철령향) 마을의 넓은 초원에서 열렸는데 수천 명의 우리 교포들이 한복으로 아름답게 차리고 (여성들), 음악리듬에 맞춰 노래부르며 춤추고 돌아가는 장면은 마치 우리 나라의 어느 한 지방에서 하는 민속축제를 보는 것 같았다.
8월18일, 동북지방에서 백두산과 더불어 유명한 관광지 「징버후」(경박호)를 관광했다. 우리 일행 6명(처제 자녀까지)은 동서 조대부가 근무하는 「자오즈챵」(조지창)에서 호의로 내준「멘보우처」(면포차·우리의 봉고차)를 타고 목단강시를 떠나 남쪽으로 달렸다. 일기는 청명한데 도로는 무성한 가로수 사이로 시원하게 뻗어 있다. 도로변에는 촌아이들이 수박·참외등을 벌여놓고 장사한다.
우리는 오전 10시쯤 발해왕국(693∼929)의 고도 동경성(상경룡천부)에 잠시 들러 1천여년 전의 역사와 그 문화를 더듬어 보았다. 지금도 당시의 우등과 우사자가 있고, 또 새로 단청한 벽와홍주의 사원 법당이 있어 감회가 깊었다.

<황금물줄기 눈부셔>
목단강시를 떠난지 3시간만에 「동방의 명주」라고 알려진 유명한 경박호 경내에 들어섰다. 이곳은 많은 차량과 인파로 붐볐는데 먼저 나타난 것은 중국의 나이애가라라 할 수 있는 경박호의 대폭포였다.
이 폭포는 경박호에서 흘러온 물이 이곳 절벽에 이르러 여러 갈래 넓은 면의 폭포수로 떨어지는데, 황금색으로 빛나는 물줄기의 굉음은 천지를 진동하는 듯 과연 북아메리카의 나이애가라를 연상케 했다. 오른손엔 스케치 연필을 들고, 왼손엔 녹음기를 들고, 손이 하나 모자라니 안사람에게 카메라를 맡겨 찍으라고 했다.
아름답게 단청한 정각에 앉아 폭프를 건너다보며 경박호에서 잡은 생선을 요리해 먹는 점심맛 또한 좋았다.
다시 차를 타고 높은 산지대의 언덕길을 올라 3백50m고지에 있는 경박호 공원에 도착했다. 여기는 더 많은 차량과 관광객, 그리고 여관·상점들이 모여 있고, 또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와 장사치들의 외치는 소리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호변에서 가까운 「싼장삔관」(산장준관)에 여장을 풀었다. 객실에서 내다보이는 경박호변의 늘어진 버드나무 사이로 화려하게 단장한 유람선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나무그늘에서는 우리나라 옷을 곱게 입은 여성들이 노래부르며 춤추고 돌아가지 않는가…. 안사람과 뛰어나가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고 이들과 어울려 이야기도 했다.
이들은 길림생 연변지방(前의 북간도)에서 온 교포들로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이곳에서 놀다간다고 했다.

<『압록강 타령』일품>
그 다음날 아침 햇살이 객실창에 비쳐 자리에서 일어나 내다보니 과연 중국인이 말하는「뚬팡더 밍주」(동방적 명주)인 경박호의 풍광이 더욱 아름답게 태양아래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 교포들과 어울려 호화로운 유람선에 올라타고 호수(동서6km, 남북45km)를 일주한다.
날씨는 청명한데 벽산은 호수에 비추이고 청산이 녹수를 안고 지나는 호면을 유람선은 명랑한 음악소리와 더불어 앞으로 나갔다.
곳곳의 수림 사이엔 홍백색의 휴양소인 빈관이 있어 때로는 중앙의 고관들이 와서 휴양한다고 스케치하는 내 옆의 청년들이 일러줬다. 스케치를 마치고 나니 위쪽 갑판에서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와 갑판 위로 올라갔다. 많은 우리 중년 부인들이 비록 거친 얼굴 모습이었으나 한복으로 곱게 단장하고 『압록강 타령』『금강산 타령』등을 부르며 어깨를 덩실거리면서 흥겨워하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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