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여정이 南에서 보낸 56시간…말 아끼며 실세 존재감 어필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은 지난 9일 특사 자격으로 방남해 모두 약 56시간을 머물며 문재인 대통령과 네 번 만났다. 김여정은 이낙연 국무총리와 서훈 국가정보원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두루 만난 뒤 11일 밤 전용기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방남 기간 동안 김여정은 가급적 말을 아끼면서도 정권 실세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정의 하이라이트는 10일 청와대 접견과 오찬이었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을 접견하며 "내가 특사입니다"라고 발언했다. 자신이 대남 특사 자격으로 왔다는 점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그 전까진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일원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김여정은 “김정은 위원장의 뜻”이라며 친서를 문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에게 “통일의 새 장을 여는 주역이 되셔서 후세에 길이 남을 자취를 세우시길 바란다”는 발언도 했다.
접견 후 오찬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전날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의 남북 공동 입장부터 음식ㆍ개마고원ㆍ문익점 등 다양한 남북 공통의 화제가 이어졌다. 문 대통령이 개막식 소감을 묻자 김여정은 “다 마음에 든다”며 “특히 우리 단일팀이 등장할 때가 좋았다”고 화답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취미인 트레킹을 화제로 올리며 북한의 개마고원 이야기를 꺼냈다. 문 대통령은 “젊었을 때 개마고원에서 한두달 지내는 게 꿈이었다. 집에 개마고원 사진도 걸어놨다”며 “마음만 먹으면 말도 문화도 같기 때문에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김여정은 “이렇게 가까운 거리인데 오기가 힘드니 안타깝다”며 “북남 수뇌부의 의지가 있다면 분단 세월이 아쉽지만 빨리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함경도의 식해와 충남 천안의 호두과자 등 음식도 인기 화제였다. 문 대통령은 이 호두과자를 천안 명물이라고 소개하자 김영남은 “조선민족 특유의 맛이 있다”고 답했다. 김영남이 식해 얘기를 꺼내자 문 대통령도 “저는 매일 식해를 먹고 있다”며 “(부모님의 고향인) 함경도는 김치보다 식해를 더 좋아한다”고 화답했다.
김영남도 “역사를 더듬어 보면 문씨 집안에서 애국자를 많이 배출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갖고 들어와 인민에게 큰 도움을 줬다”고 덕담을 건넸다. 김영남은 이어 “문익환 목사도 같은 문씨인가”라고 물었고, 문 대통령도 “그렇다. 그 동생 분인 문동환 목사를 지난해 뵈었다”고 답했다. 남북 언어 차이와 관련해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오징어와 낙지가 반대”라고 말하자 김여정은 “그것부터 통일해야겠다”며 웃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여정은 그 이외의 자리에선 되도록 발언을 자제했다. 청와대 일정 후 강릉 스카이베이 호텔로 이동해 조명균 장관이 주재한 만찬에선 “서울이 낯설지가 않다” “(개막식에서) 별로 춥지는 않았다”고 말한 정도다. 만찬 후엔 곧바로 강릉 관동 아이스하키 경기장으로 이동해 북한 응원단 뒷줄에 문 대통령과 나란히 앉아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의 경기를 관람했다. 김여정은 11일 서울 숙소인 워커힐호텔에서 이낙연 총리가 주재하는 오찬에 참석했는데, 여기에서도 별다른 발언은 없었다. 오찬에 참석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통화에서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김여정 특사의 목소리도 못 들었을 정도로 말을 아꼈다”고 전했다. 정 전 장관이 “오빠 뒤에 서있는 사진을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실제 만나니 키가 크시군요”라고 하자 빙긋이 미소만 지었다고 한다.
오찬때 남측이 기념촬영을 제의하자 북측 인사들은 김여정에게 가서 귓속말로 보고를 한 뒤 그의 허락이 떨어진 뒤에야 움직였다고 한다.
김여정의 일정은 출발 직전까지 빡빡했다. 임종석 비서실장 주재로 5시20분부터 서울 중구 반얀트리호텔에서 만찬을 한 뒤, 7시부터는 인근 국립극장에서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을 관람하며 문 대통령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는 인천국제공항에 대기 중이던 김정은 위원장의 전용기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