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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1 맞짱서 독사 깨문 조오련, 도버 횡단 땐 라면 끼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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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호 25면

<스포츠 다큐 - 죽은 철인의 사회> 가족이 기억하는‘아시아 물개’

조오련은 체계적인 영법 지도를 받지 못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량과 강한 근성으로 장거리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발휘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자유형 1500m에서 우승한 뒤 환호하는 조오련. [중앙포토, 사진 조성웅]

조오련은 체계적인 영법 지도를 받지 못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량과 강한 근성으로 장거리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발휘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자유형 1500m에서 우승한 뒤 환호하는 조오련. [중앙포토, 사진 조성웅]

“조오련이하고 바다거북이하고 수영 시합 하모 누가 이기는 줄 아나?”

가난 벗으려 고1 때 무작정 상경 #노숙과 간판일 하며 수영 독학 #유도부와 싸울 때 뱀 깨물어 겁줘 #도버 건널 때 측근, 돈 들고 잠적 #창고서 자며 라면 먹고 횡단 성공 #“도전 자체를 사랑하고 즐긴 상남자”

8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친구’(감독 곽경택, 주연 장동건·유오성)에 나오는 대사다. 지금이야 ‘수영하면 박태환’이지만 70~8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에겐 ‘수영=조오련’이었다.

조오련(1951-2009)은 1970년 방콕,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연거푸 우승했다. 1980년 대한해협(48㎞)을 13시간16분 동안 헤엄쳐 건넜다. 82년에는 도버해협(34㎞)을 9시간35분 만에 횡단했다. 2005년 울릉도~독도 구간을 3부자 릴레이로 18시간 걸려 주파했고, 2008년엔 독도를 33바퀴 돌기도 했다.

‘아시아의 물개’라는 별명을 얻었던 조오련은 잇따른 기행과 코믹한 내용의 방송 출연 때문에 ‘유쾌한 괴짜’ 정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대한해협 파도만큼이나 거칠었고, 도전으로 점철된 시간은 시련과 아픔의 연속이었다.

1980년 대한해협 횡단에 나서기 직전 배 안에서 바세린 마사지를 받는 모습. 조오련은 일본인이 72년 일본~한국 대한해협 횡단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도전에 나섰다고 한다. [중앙포토, 사진 조성웅]

1980년 대한해협 횡단에 나서기 직전 배 안에서 바세린 마사지를 받는 모습. 조오련은 일본인이 72년 일본~한국 대한해협 횡단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도전에 나섰다고 한다. [중앙포토, 사진 조성웅]

조오련 선생은 2009년 8월 4일 전남 해남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해 4월에 재혼을 하고 “대한해협 횡단에 재도전하겠다”며 제주도에서 맹훈련을 하다 해남으로 잠깐 다니러 온 참이었다. 스폰서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아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한다.

조오련은 금메달을 수집하는 데는 탁월했지만 돈 모으는 재주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부인은 패션 브랜드 ‘논노’의 디자이너였다. 은퇴 후 함께 봉제공장을 했지만 쫄딱 망했고, 네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89년 강남 압구정동에 개장한 조오련수영교실이 성공하면서 살림이 피었다. 그런데 2001년, 남편의 출근을 돕던 아내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급히 응급조치를 했지만 병원 이송 도중 숨졌다.

조오련 선생의 차남 성모 씨는 2002 부산아시안게임 자유형 1500m에서 은메달을 딴 수영 스타였다. 호주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8년 만에 또다시 임종도 못 하고 아버지를 보내자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두 달 동안 집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후배가 ‘이러다가 죽겠다’ 싶어서 방송사에 연락을 해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억지로 출연시켰다. 180cm의 키에 115kg 나가던 조성모가 80kg대로 감량하는 과정이 TV를 통해 안방에 전달됐다. 그러나 그 후 우울증 약 부작용과 폭식 때문에 160kg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성모 씨는 미국 LA에서 수영 코치 자격증을 따기 위해 연수 중이다. 그와 어렵게 통화가 됐다. “지금은 우울증 약 끊고 꾸준히 운동해 90kg대를 유지하고 있다. 아버지를 재조명해 주신다니 정말 고맙다. 아버지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조오련의 아들’로 질시와 견제를 많이 받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 자서전을 내고 싶어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얘기들을 메모한 게 있다”며 모아놓은 자료를 보내줬다. 그 속에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일부를 요약한다.

매일 뒷산 뛰고 소리친 덕에 폐활량 좋아져

나는 1951년 10월 5일 전남 해남 작은 농촌 마을에서 5남5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뒤끝이라 정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동네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놀았고, 어른들이 “오연(五連)아, 싸게 고기 몇 마리 잡아라”하면 맨손으로 바위 밑에 숨어 있는 붕어나 메기를 잡아 드렸다.

중학교 때는 도시락을 못 싸갈 정도여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난에 대한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어린 마음은 터질 것만 같았다. 매일 새벽 집앞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고 정상에 올라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씨벌넘들아~.”

덕분에 나는 폐활량이 엄청나게 좋아졌고,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트롬본 해 보라는 권유도 받았다. 해남고 1학년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 우연히 수영대회를 봤다.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전국 3등 안에만 들면 돈 받고 학교 다닐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1968년 10월, 부모님 몰래 자퇴서를 내고 목포에서 완행열차에 도둑 승차를 했다. 16시간 걸려 서울역에 도착한 뒤 수영 명문이라는 오산고를 무작정 찾아갔다. 학교 관계자가 “수영부가 전지훈련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서울역에서 한동안 노숙을 하다가 종로 2가 간판집에 들어가 막일과 잔심부름을 했다. 근처에 당시 유일한 실내 수영장인 YMCA 수영장이 있었다. 첫 월급으로 한 달 치 회원권을 끊고 혼자 열심히 수영을 했다.

하루는 수영장 안에서 어떤 녀석과 시비가 붙었다. 나오라고 했더니 15명 정도가 우르르 따라 나왔다. 인근 중·고등학교 유도부 선수들이었다. ‘맞아 죽겠다’ 싶어서 “난 남자다. 30분 뒤에 이 자리에서 다시 보자”고 했다. 간판집으로 달려가 사장님께 500원을 꾼 뒤 뱀 장수에게서 독사 한 마리를 샀다. 유도부 애들한테 돌아가 뱀을 꺼내 대가리를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반 이상이 기겁을 하고 도망쳤고, 난 제일 세 보이는 놈과 엉겨붙었다. 실컷 두들겨 맞다가 녀석 뒤통수가 보이기에 사정없이 씹어 버렸다. 상황은 종료됐고 그 후 “조오련은 미친놈이다. 상대하면 안 된다”는 말들이 퍼졌다. 뱀 대가리 맛? 너무 비렸다.

둘째는 수영 선수, 첫째는 UDT 출신

2005년 8월 울릉도~독도 횡단에 나선 3부자. UDT 대원이었던 장남 성웅, 조오련 선생, 수영 국가대표였던 차남 성모. 이들은 1박2일간의 18시간 릴레이 수영 끝에 독도에 도착했다. [중앙포토]

2005년 8월 울릉도~독도 횡단에 나선 3부자. UDT 대원이었던 장남 성웅, 조오련 선생, 수영 국가대표였던 차남 성모. 이들은 1박2일간의 18시간 릴레이 수영 끝에 독도에 도착했다. [중앙포토]

난 매일 새벽 종로 2가에서 마장동 우시장(당시는 도살장)까지 왕복 달리기를 했다. 겨울 아침 수영장 문 열기도 전에 간 적도 많았다. 전문적인 영법을 못 배웠지만 오래 수영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1969년 6월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에 일반부 선수로 출전했다. 수영복이 없어 사각팬티를 입고 400m와 1500m에서 1등을 했다. 그날 귀빈석에 당시 대한체육회장인 소강 민관식 선생이 계셨다. 그분 도움으로 태릉선수촌에서 체력 테스트를 받고 대표선수가 될 수 있었다. 수영부가 있는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다. 난 오산고 대신 손기정 선생의 모교 양정고를 택했다.

전남 영암에 사는 조오련 선생의 누나 조현숙 씨와 통화가 됐다. “동생은 남 도움받거나 손 벌리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했어요. 아시안게임 금메달 따고 나라에서 ‘뭐 해줄까’ 물어도 필요한 것 없다고 했지요. 해외 시합 나갈 때 친지들이 달러를 주면서 ‘좋은 물건 좀 사다 달라’고 해도 한 개도 안 사 왔어요. ‘내가 대한민국 국기 갖고 가서 태극기 올리고 왔는데 가방에다 남의 나라 물건 갖고 올 일이 없다’고 했죠.”

조오련은 민족의식이 남달랐다고 했다. 방콕 아시안게임 가기 전에 “내가 우승하면 우리나라를 드러낼 수 있는 거 좀 해주씨요”해서 태극기를 수 놓은 머리띠를 만들어 줬다고 한다. 조오련은 그 머리띠를 하고 어머니가 만들어 준 모시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섰다.

조현숙 씨는 1982년 도버해협 횡단 뒷얘기도 들려줬다. 모두가 성공이라고 했지만, 조오련 자신은 실패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경비를 모금해서 간 사람이 잠적해 버렸어요. 거기서 라면 먹고 창고에서 자면서 도버해협을 건너긴 했지만, 목표로 했던 횡단 최고 기록을 세우지 못했고, 왕복하겠다는 약속도 못 지켰어요. 동생은 그 사실을 나하고 엄마한테만 얘기했어요. 그분도 대한민국 사람인데 밝힐 필요가 없다면서.” 조현숙 씨는 “깨끗하고 맑은 정신을 가진 동생이었는데, 두 번째 결혼이 좀…”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조오련 선생의 장남 성웅 씨는 서울 청담동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해군 특수부대인 UDT에 입대해 훈련 중 어머니 부음을 접했다고 한다. “일주일 장례를 치르고 복귀했더니 가장 힘든 훈련인 지옥주(週)가 시작됐어요. 내가 혹시라도 사고를 칠까 봐 교관들이 더 혹독하게 다뤘어요. 어머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아버지는 아내이자 친구이자 어머니 같은 분을 동시에 잃은 거라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장남은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했다. “산이 거기 있어서 산을 오른다고 한 등반가의 말처럼, 아버지는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도전하고 그걸 즐기셨죠. 이런저런 수식어 필요 없이, 그분의 삶 자체가 도전이었습니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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