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증오와 自虐을 키우는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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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내전으로 인한 증오는 오래 간다. 다른 민족과의 전쟁보다 내전은 참혹하다. 같은 민족, 같은 국민끼리 죽이고 죽인 탓에 생긴 원한과 미움은 몇 세대를 간다. 한국전쟁의 경우도 그렇고 미국의 내전인 남북전쟁도 그렇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는 19세기 중반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의 수도다. 워싱턴과의 거리는 1백60km 정도. 그 사이가 남북전쟁 때 주전장이었다. 올해 4월 리치먼드에 링컨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미국의 재통합과 화합을 외쳤던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미국 내 여론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부동의 1위가 링컨이다. 워싱턴에는 링컨 기념물이 흔하다. 놀랍게도 리치먼드에선 그동안 링컨 동상이 없었다.

동상 건립은 힘들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1백38년 만의 첫 동상인데도 반대 여론은 거칠었다.'남부 참전군인 자손'이란 단체는 남부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워싱턴의 연방정부에 대항해 주(州)우선주의를 내건 남부연합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상은 남북전쟁 전적지 공원에 있다. 벤치에 앉은 링컨이 막내아들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감싼 채 고뇌하는 모습이다. 북군이 리치먼드를 함락한 직후 아들과 함께 그곳에 갔던 링컨의 모습을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 앉은 자세의 소박한 형상은 정감이 넘친다.

도시 중심가에는 남부연합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의 거대한 동상이 있다. 북군에 체포됐던 데이비스 동상의 화려한 위용에 비하면 링컨 동상은 초라하다. 그런데도 반대여론으로 시끄러웠다.

지난주 그곳을 찾은 내게 전적지 관계자인 빌 해리슨은 이렇게 말했다. "건립반대는 거칠었지만 소수였다. 내전은 통상 이민족 간의 전쟁보다 잔인하다. 후유증은 길다." 남북전쟁의 전사자는 60여만명. 이는 1, 2차 세계대전.한국전.베트남전 등 20세기 전쟁에서 숨진 미군을 전부 합친 숫자보다 많다.

링컨은 남북 재통합을 위해 완벽한 승리를 추구했다. 어설픈 협상으로 얻은 평화는 썩게 마련이고 또 다른 분란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공원에선 관람객들을 놓고 '링컨과 남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안내자는 동상 뒤쪽 돌담에 새겨진 '나라의 상처를 싸매자'(To bind up the nation's wounds)라는 글귀를 언급했다. "링컨 대통령의 재선 취임연설에서 따왔다. 화해와 관용의 메시지다. 그것이 전쟁으로 생긴 증오와 원한을 잠재웠다."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은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과 반목의 진원지다. 휴전 후 남북한 정부는 어느 쪽이 국민을 인간답게 살게 하고 반듯한 나라로 만드느냐를 놓고 경쟁했다. 그 경쟁은 오래 전에 남쪽의 완승으로 끝났다.

북한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선전전에 몰두했다. 친북 좌파는 남한 사회 내 분열과 불화를 부채질하는 데 앞장섰다. 그들은 증오와 자학(自虐)의 역사관을 심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은 전 세계의 신생 독립국 중 유일하게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했다.

그 극적인 성취를 스스로 헐뜯고 학대하는 풍조를 퍼뜨려온 세력이 친북 좌파다. 그들은 한.미 동맹에서 일부 어두운 부분만 키워 그것을 민족감정과 교묘히 연결시켰다. 민족 전체를 파멸의 인질로 삼고 있는 북핵은 덮고 비굴한 평화론을 내세웠다.

신성한 민족주의는 위선으로 얼룩졌다. 이들의 기도는 주효하고 있다. 그 바람에 우리 사회는 심하게 찢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위선의 사회풍조, 자학의 역사관이 판치는 한 성공할 수 없다.

박보균 논설위원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