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안전한 세상은 공짜로 오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함인선 건축가·한양대 건축학부 특임교수

함인선 건축가·한양대 건축학부 특임교수

‘화불단행(火不單行)’이라 해야 하나. 최근 대형 화재 참사가 잇따르고 있다. 29명이 숨진 충북 제천 화재 참사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경남 밀양에서 대형 화재로 39명이 희생됐다.

제천 이어 밀양서도 대형 화재 참사 #성장 만능 시대의 ‘설마주의’ 판쳐 #‘안전대진단’ 같은 전시성 대책보다 #징벌적 배상·‘건물 주치의’ 필요해

불과 관련한 재난을 막는 관건은 초기진압과 피난이다. 각종 감지장치와 옥내소화전, 스프링클러는 불이 확산하기 전에 다스리는 장치다. 비상통로·배연창·방화문과 스모크 타워는 사람들이 피할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밀양과 제천 화재에서 모두 이 두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건물주의 욕심이 화를 키웠음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비상구, 불법증축, 과밀 병상 등.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말마따나 ‘이번 사고도 무분별한 규제 완화와 이윤 중심적 사고가 원인’인 듯하다.

1911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봉제 공장(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에서 불이 났다. 공장주가 비상통로 문을 잠가 놓는 바람에 10~20대 소녀 146명이 도로 위로 하염없이 추락해 숨졌다. 이 참사를 계기로 시민·정치인·노동단체들은 공공안전위원회를 만들어 강한 안전규제를 만들었다. 이후 미국에는 2001년 9·11테러 때까지 이보다 많은 건물에 의한 대규모 인명사고는 없었다. 맨해튼 화재 당시에만 해도 미국도 하루 100명씩 죽어 나가는 ‘고위험 사회’였다. 싼 목숨값 때문이었다. 골드러시 때 사람 목숨값은 노새보다 못했다고 한다.

한 시대의 사고 발생률은 당대의 사람 목숨값과 반비례한다. 50년 전 경부고속도로는 건설 인부 등 77명의 사망자를 내고 불과 29개월 만에 완성됐다. ‘터널 공사에서 수맥이 터질까 두려워 작업자가 주저하고 있으면 서슴지 않고 착암기를 뺏어 들고 직접 바위를 깨고는 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전 회장의 생전 회고담이 무용담처럼 회자하던 비정상의 시대였다.

시론 2/1

시론 2/1

경부고속도로 1㎞ 짓는데 9.3명이 숨졌다면 최근엔 1㎞ 건설에 1명 사망으로 줄었다. 그 사이 목숨값이 10배 비싸지기는 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소득이 150배 늘었으니 여전히 우리 사회는 목숨값이 싼 사회다. 그런데도 고속 성장 만능 시대에 만연했던 ‘설마 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아직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제천이나 밀양 건물주처럼 남의 생명과 안전에 큰 책임 있는 이들의 행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국 경제는 세계 10위권으로 도약했지만, 안전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경제 발전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생명과 안전을 무시한 후진국형 사고가 종종 ‘안전 불감증’이라는 병리적 용어로 둔갑한다.

그런데 내막을 잘 들여다보면 사고를 초래한 건물주의 행태 이면에는 철저한 금전적 계산이 숨어 있다. 밀양 세종병원의 경우 10% 면적을 불법증축했으면서도 6년 동안 ‘껌값’ 수준인 고작 3000여만 원을 이행강제금으로 내며 버젓이 영업을 계속 해왔다. 안전을 위협하는 불법증축이 당장 병원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전 취약 지역 29만 곳에 대한 국가안전대진단’ 같은 정부의 허무한 전시성 대책보다 더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안전을 담보로 하는 불법건축을 막으려면 건물주가 불법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효과를 상쇄시키는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이행강제금을 100배 인상하자. 세월호 참사는 국민적 공분을 일으켜 ‘유병언법’을 만들었다. 실제 피해액보다 훨씬 많은 배상금을 물게 하는 징벌적 배상제도다. 이번에도 실효성 있는 대책이 되려면 원인 제공자가 막대한 개인적·사회적 비용을 물도록 해야 한다.

규제와 처벌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은 감시를 통한 예방, 즉 시스템이다. 그러나 공무원은 평소 개별 대응을 해야 하는 감시·예방에 서툴뿐더러 귀찮아하기 때문에 선호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분야야말로 민·관 협력통치가 필요하다. ‘건물별 주치의’ 제도를 도입해 눈 뜬 시민이 주체가 되는 안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최근에는 기술 발달로 안전 감시를 사람 없이도 한다. IoT(사물인터넷) 기술은 건물의 모든 부위 차원에서 화재와 변형을 감시하고, 3차원 가상현실(3D VR)로 재난과 범죄를 재현해 예방책을 만든다. IBM(Building Information Modelling) 기법으로 건축 자재 단계에서 공간정보까지 모두 담아 유지·관리할 수 있다. 영국 공공건축에서는 이미 강제사항이다.

공익을 위한 미래기술 투자와 활용은 민간이 아닌 정부가 해야 한다. ‘안전한 세상’은 비싸다. 참담함과 처벌로 쉽게 오지는 않는다.

함인선 건축가·한양대 건축학부 특임교수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