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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ㆍ에스토니아 가는 한국기업…'코인 자본주의' 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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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컨벤션홀. 프로그램과 관련된 개발자·디자이너ㆍ기획자 등 100여 명이 모인 이곳에서 블록체인 세미나가 한창이었다. 싱가포르의 유명 블록체인 재단 ‘카이버 네트워크’와 국내외 5개 블록체인 기업들이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탈(脫) 중앙화된 거래소와 앱마켓 ^콘텐트 시장에서 블록체인의 가능성 ^블록체인들을 연결하는 블록체인 등 각자 개발한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주로 20~30대인 참가자들은 자유롭게 묻고 토론했다.
카이버 네트워크의 로이 루 대표는 “한국에 올 때마다 블록체인으로 뛰어드는 개발자들이 빠르게 늘고 있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싱가포르 블록체인 카이버네트워크 창업팀과 국내 개발자들이 만났다. 세미나에 이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스타트업들의 경진대회도 열렸다. 박수련 기자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싱가포르 블록체인 카이버네트워크 창업팀과 국내 개발자들이 만났다. 세미나에 이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스타트업들의 경진대회도 열렸다. 박수련 기자

이날엔 국내에서 처음으로 블록체인 개발대회도 열렸다. 대회 우승을 차지한 보안기술 기업 ‘웁살라’의 패트릭 김 대표는 “2년 전 이더리움 블록체인의 보안상 허점을 발견해 이더리움 재단 측의 수정을 이끌어낸 적이 있다”며 “집단 지성을 통해 보안 정보를 공유하고 그들에게 보상(코인ㆍ토큰)을 주는 블록체인 생태계가 디지털 보안 위협을 막아내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영국계 보안기술 기업에서 일하던 그는 한국인 동료와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웁살라를 창업했다.

블록체인이 자본주의 얼굴 바꿀까 #암호화폐로 투자금 모으는 ICO, 지난해 전세계 4조원 #국내 ICO 막히자 국내 기업들 해외서 자금 조달 #"코인 가격 등락 심하면 제 역할 어려워" 비판도

블록체인에 뛰어든 2030 테크 엘리트 

국내 2030 테크 엘리트들도 블록체인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다. 이들은 서울 강남ㆍ신촌ㆍ판교 일대에서 매주 열리는 블록체인 세미나에 참석하며 블록체인을 공부하고 창업을 이야기한다. 지난 6개월 간 블록체인 투자펀드 ‘해시드’의 초청으로 방한한 부테린 비탈릭 이더리움재단 창업자나 ‘중국판 이더리움’ 네오(NEO)의 다 홍페이, 이더리움 이후 ‘3세대 블록체인’의 선두주자 EOS의 브랜단 블 등도 서울에서 이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최근엔 공대생을 중심으로 블록체인 기술 연구회도 생겼다. 이달 초 ‘연세대 블록체인 연구회(연블)’를 만든 이현제(24ㆍ전기전자공학부 2학년)씨는 “블록체인을 알고나선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며 “미국ㆍ중국에선 대학생들의 연구가 활발하다던데 우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들 2030 블록체인 지지층은 공통적으로 블록체인 기반의 ‘코인 경제’가 현 인터넷 경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인터넷은 초창기 의도했던 개방성은 사라지고 구글ㆍ페이스북ㆍ아마존 같은 거물 기업이 정보와 기술을 독식하는 폐쇄적인 시장이 됐다는 비판이다.
블록체인 기업을 창업하고 육성하는 체인파트너스의 표철민 대표는 “구글이나 네이버가 너무 커져 각 나라의 시장을 독과점해버렸다"며 "현재의 인터넷은 더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표 대표는 중학교 2학년 때 인터넷 기업을 창업해 16년 간 IT 비즈니스를 해왔지만 은행ㆍ포털 같은 거간꾼(중개 업체)들이 많은 수수료를 챙기는 현재 인터넷 경제에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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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하던 사람도 구글 들어가면 바보 되는 인터넷경제"  

웁살라 공동창업자인 박해민씨도 “똑똑하던 사람도 구글에 들어가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다”며 “조직에 기대지 않아도, 개인이 능력만 발휘하면 (공동체가 인정해주는) 코인이나 토큰을 통해 보상받을 수 있는 블록체인 시스템이 (기존 인터넷보다) 더 오래 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ㆍ은행ㆍ기업 기관의 권위보다 공동체의 신뢰로 유지되는 블록체인 시스템이 더 경쟁력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블록체인의 두 가지 특징에서 비롯된다. 먼저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 돈은 네 돈이 맞다’고 자산을 인정해주는 신뢰 시스템이 정부나 기업이 만든 인증 시스템보다 더 낫다는 '믿음'이다. 또 주주나 경영진이 아니어도 누구든 해당 블록체인의 가치를 높이는 활동을 하면 보상(코인ㆍ토큰)을 해주는 '인센티브'다.

가령, 출발지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근처에 있는 택시를 불러주도록 설계된 블록체인 앱 T가 있다고 치자. 블록체인 생태계에선 T 앱을 초기부더 적극 사용한 택시기사와 승객, 또 T를 응용해 더 좋은 택시 앱 T2를 만든 개발자들에게 T토큰을 발행해준다. 이들이 T를 직접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T가 시장에 확산되도록 기여했기 때문이다. T토큰을 받은 사람들은 그걸로 T앱을 이용할 수도, 달러나 원화 같은 법정통화로 환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T토큰을 갖고 있다가 T 앱이 크게 인기를 끌어 T토큰의 가치가 높아질 때 환전하면 더 높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T토큰은 화폐이자 주식인 셈이다.  

"우버 성장해도 우버기사 삶은 그대로…블록체인이 주주자본주의 대안" 

이런 전제 하에 블록체인을 지지하는 2030은 ‘블록체인이 주주 자본주의를 이어갈 다음 모델’이라고 믿는다. 김서준(34) 해시드 대표는 “현재 주식회사 모델은 기업이 아무리 성공해도 초창기부터 제품ㆍ서비스를 쓰면서 입소문 내주던 소비자들에겐 어떤 보상도 공유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버의 기업가치가 수십조원이 돼도 우버 택시기사의 삶은 여전하고, K팝 스타가 아무리 잘나가도 소속사만 이익을 챙길 뿐 무명 때부터 열심히 응원한 팬들에겐 음원 파일 하나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상품(우버ㆍK팝 스타)을 믿고 참여한 이들이 언제든 주주가 될 수 있고 보상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여주는 게 공정한 모델“이라고 주장했다.

김 대표도 IT 기업을 창업했던 테크 엘리트다. 포항공대 졸업 후 인공지능 수학교육 플랫폼 노리(KnowRe)를 창업했고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사업을 키웠다. 하지만 2년 전 이더리움을 접한 후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IT 기업 창업자라면 구글ㆍ아마존ㆍ페이스북ㆍ우버 같은 정점의 회사들을 동경하기 마련인데, 너무 커져서 오히려 위협적인 그들이 내가 지향할 미래는 아니다 싶어 찝찝했다”고 말했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데이터를 독점하는 거대 IT기업의 선의나 정부가 공정한 중개자일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젊은 세대들이 블록체인에 공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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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에 확신을 가진 김서준 대표는 지난해 ‘크립토 펀드(Crypto Fundㆍ암호화폐 투자펀드)’를 운용하는 해시드를 창업했다. 국내외 기술 기업들에 엔젤투자(극초기 단계 투자)하며 모은 종잣돈으로 김 대표는 이더리움을 샀고, 그 이더리움으로 펀드를 조성해 글로벌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것이다. 해시드는 현재까지 전세계 30개 프로젝트에 투자하며 글로벌 크립토펀드 업계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블록체인 기반 자금조달(ICO) 규모 37억 달러  

이들은 블록체인 기업들의 ICO(Initial coin offeringㆍ코인발행을 통한 기업공개)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ICO는 기업들이 처음 발행한 코인 물량을 판매해 투자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주식시장 상장을 위해 진행하는 IPO(Initial Public Offering)과 유사한데 주식대신 코인을 발행하는 것이다. ICO를 하면 신생 기업들은 벤처캐피탈(VC)에 지분을 떼어주지 않고도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블록체인 혁명>의 저자인 돈 탭스콧은 최근 방한해 “신생 기업에게 ICO는 훌륭한 자금 조달 방법”이라며 “일부 ICO는 사기일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지만 VC의 투자를 받은 회사도 망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코인스케줄닷컴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ICO를 통해 조달된 자금은 37억 달러(약 4조원)가 넘는다. 지난해 전 세계 벤처캐피탈의 투자금(1550억 달러)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미국 뉴욕증시의 지난해 IPO 규모(356억 달러)의 10분의 1 수준에 이를 만큼 급증했다.

지난해 암호화폐 투자 과열이 심해지면서 국내에서도 ICO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ICO를 하는 기업이 어떤 사업을 하려는 지 잘 모르면서도 돈을 들고 몰려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블록체인 기술력이나 아이디어 없이 사기성이 짙은 ICO들이 이런 틈을 파고 들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지난해 9월 이후 ICO를 법적으로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관련 법 개정은 이뤄지지 않아 현재로선 ICO를 금지할 근거도 명확하지 않다. 암호화폐를 유가증권으로 볼 지 현금으로 볼 지 제도적으로 정리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엄포로 ICO는 줄었을까. 기업들은 한국 대신 해외로 나가 ICO를 하고 있다. 스위스·싱가포르·에스토니아·지브롤터 등 외국 기업의 투자에 친화적이고 암호화폐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진행 중인 국가들이다.

한국 ICO 금지하자 스위스·에스토니아로 나가는 스타트업들

한국 스타트업 '더루프'는 스위스로 갔다. 이들이 개발한 ‘아이콘(ICON) 블록체인’은 지난해 9월 ICO를 했다. 아이콘은 전 세계 여러 블록체인을 연결하는 블록체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국내 ICO를 금지하겠다고 하자 스위스에 법인을 만들어 ICO를 진행했다. 그 결과 ICON 코인 발행을 통해 4750만 달러를 조달했다. 지난해 전 세계 ICO 중 14번째로 큰 규모의 ICO로 기록됐다. 이외에 개인이 의료기록을 관리하는 블록체인 스타트업 메디블록도 지브롤터에 법인을 세우고 ICO를 했다.

국내 게임업계에서도 ICO로 자금을 조달하는 사례가 나왔다. VR·AR(가상·증강현실) 게임 개발사인 리얼리티리플렉션은 에스토니아에 법인을 세우고 증강현실(AR) 게임 '모스랜드'의 ICO를 29일 시작한다. 이 회사엔 구글 등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두 차례 기업을 매각한 경험 있는 연쇄창업자 노정석씨가 참여하고 있다. 개발팀은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해 실제 현실 거리에 보이는 건물들을 게임 사용자들이 게임 머니로 획득하거나 판매하고, 다른 사용자들과 암호화폐로 건물을 교환할 수 있는 게임을 개발 중이다.
이 회사의 노정석 최고전략책임자(CSO)는 "ICO를 통해 조달한 자금으로 글로벌 시장 공략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ICO 제도권 흡수해야" vs "널뛰는 코인가격 한계"

전문가들은 ICO를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대한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정지훈 다음세대재단 이사(빅뱅엔젤스 매니징 파트너)는 "ICO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며 "특정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 기업의 경쟁력에 근거해 개인들이 아주 적은 돈으로도 투자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는 흐름이 있는데, 우리만 ICO를 금지하고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부작용만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도 "협력과 공유에 기반한 블록체인 생태계에선 다수의 개인이 소액으로 참여할 수 있는 ICO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는 “IPO가 자본시장의 오페라라면 ICO는 뮤지컬에 가깝다”며 “오페라의 경직성을 깬 뮤지컬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냈듯 ICO가 제도적으로 정착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게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영식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ICO를 통해 조달된 자금의 가치가 하루가 멀다하고 널뛰기한다면 여러 면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안정적으로 자금을 확보하려고 ICO를 했는데 하루 지나고 나니 그 가치가 반토막으로 줄어든다면 자금 조달 수단으로서 지속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JTBC 토론에 출연했던 유시민 작가도 “자원을 독점한 이들이 계속 자원을 독점하게 된다”며 “블록체인으로 누가 돈을 버는지 보면 채굴기업과 그런 기업의 지분을 가진 기업이나 개인들이 돈을 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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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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