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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영어 실력은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 덕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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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대회 4회 우승에 빛나는 짐 쿠리어와 영어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정현(왼쪽). [멜버른 AP=연합뉴스]

메이저 대회 4회 우승에 빛나는 짐 쿠리어와 영어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정현(왼쪽). [멜버른 AP=연합뉴스]

테니스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정현(22·한국체대).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데는 테니스 실력 못지않은 영어 실력이 한몫했다. 특히 승리 직후 관중 앞에서 하는 온코트 인터뷰에서 재치있는 답변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호주오픈 조직위원회는 유튜브에 32강전부터 8강전까지, 정현의 온코트 인터뷰를 3건 올렸다. 이 영상의 조회는 28일 기준으로 42만건에 이른다.

특히 16강전에서 전 세계 1위 노박 조코비치(31·세르비아)를 3-0으로 꺾은 뒤 했던 인터뷰의 조회 수는 25만건을 기록했다. 인터뷰의 백미는 "3세트 타이브레이크 때 3-0에서 3-3으로 추격을 허용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나"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부분이다. 정현은 "1, 2세트를 땄기 때문에 4, 5세트에 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조코비치보다 더 젊기 때문이다. 나는 2시간은 더 뛸 수 있었다. 하하. 그래서 3세트는 져도 상관없었다"고 말해 폭소를 끌어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8강전 직후 "로저 페더러와 토마시 베르디흐 중 4강전 상대로 누굴 원하냐"는 질문에 "반반"이라고 한 정현의 위트를 놓고 "외교관급 화술"이라고 칭찬했다.

미국 드라마 보면서 자연스럽게 익혀 #심리학 전공 매니저로부터 도움도 받아

영어를 가르쳐 준 정현도 교수(오른쪽)와 정현. [사진 정현도 교수]

영어를 가르쳐 준 정현도 교수(오른쪽)와 정현. [사진 정현도 교수]

 이런 정현의 영어 인터뷰 실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2009년 미국 플로리다주로 테니스 유학을 떠나 2년간 지내면서 기본 회화는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긴 문장으로 듣고 말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2014년 세계 전역을 돌며 투어 대회에 참가하면서 정현은 영어로 소통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당시 정현을 가르쳤던 윤용일 코치는 2015년 미국에서 스포츠 심리학을 공부하던 정현도(35)씨를 섭외했다. 10대를 미국·영국 등지에서 보낸 정씨는 정현의 영어교사 겸 매니저를 맡았다. 2016년까지 2년간 함께 투어를 다니며 정현을 가르쳤다. 윤 코치는 당시 "투어 선수는 1년 중 3분의2 이상 해외에서 생활한다. 영어를 자유롭게 해야 대회가 열리는 현지를 집처럼 생각할 수 있고, 마음 편히 경기할 수 있다"고 영어교사 영입 배경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정현도씨는 어떻게 정현을 '외교관급' 화술을 구사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정씨가 정현에게 가장 많이 강조했던 건 '암기'가 아니라 '배경 이해'였다. 정씨는 "단순히 영어 단어를 외우라고 하지 않았다. 투어를 돌며 현지 역사와 문화 등을 이해시키고, 이를 영어로 말해보게 하는 등 배경지식을 통해 영어 실력을 늘렸다"고 전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니스 대회에 나가면, 홍합요리 같은 현지 대표 음식을 먹으면서, 그 음식이 유명한 이유나 니스의 역사적 배경 등을 영어로 이야기해보는 식이다.

 준결승 진출을 확정지은 뒤 코트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정현(왼쪽). [멜버른 AP=연합뉴스]

준결승 진출을 확정지은 뒤 코트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정현(왼쪽). [멜버른 AP=연합뉴스]

정씨는 또 정현에게 '프리즌 브레이크' '모던 패밀리' 등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보여줬다. 여기에도 단계가 있었다. 처음엔 한국어 자막과 함께 보게 하고, 그다음엔 영어 자막과 함께 보게 했다. 그리고는 드라마나 영화 속 재미있는 표현을 정현이 직접 골라 외우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다음 날 다른 선수들을 만나 그 표현을 사용해 대화하게 시켰다.

일상 회화가 점점 더 능숙해지자 본격적인 인터뷰 공부를 시작했다. 유튜브에서 다른 선수 인터뷰를 찾아 반복해서 봤다. 곤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도 정현은 이런 과정을 통해 습득했다. 호주오픈에서도 16강전 승리 후 기자회견에서 외국 취재진이 "평창올림픽에서 남북한 단일팀이 구성된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예민한 질문을 했고, 정현은 정중하게 "나는 테니스 선수라서 그 부분에 관해선 말할 게 없다. 미안하다"고 넘겼다.

정현의 인터뷰가 처음 호평을 받은 건 2016년 1월 남자프로테니스(ATP) 기량발전상(MIP)을 받았을 때다. 정현은 수상 소감 때 그냥 "쌩큐"라며 끝내지 않고, "가족과 팬, 그리고 나를 뽑아준 다른 선수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 상은 내게 더욱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정현도씨는 "이 수상 소감은 '수상 소감의 정석'으로 인정받아 ATP에서 선수 교육자료로 쓰고 있다"고 전했다.

정현은 정현도씨로부터 현재는 24시간 과외를 받지 못한다. 정씨가 지난해 박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대학에 교수로 임용됐다. 그래서 둘은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최근 정현이 정씨에게 자주 물어보는 건 '소셜미디어(SNS)용 영어'다. ATP는 선수들에게 SNS 활용을 적극적으로 권유한다. 정현은 전 세계 팬을 위해 영어와 한국어로 포스팅한다. 정씨는 "(정)현이는 절대 영작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가 생각해서 영어 문장을 보내면, 내가 그걸 보고 다양한 표현을 제시한다. 그러면 현이가 적절하게 섞어 자신만의 문장을 완성한다"고 했다. 정현은 "(정)현도 형 덕분에 영어가 많이 늘었다. 늘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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