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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반대자에 재갈” vs “형사처벌 필요성 여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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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호 12면

[임장혁의 로킥(Law Kick)] 권력 따라 바뀐 ‘명예훼손’풍향계

박근혜 전 대통령에 관한 의혹을 제기했다가 기소돼 결국 무죄 판결을 받은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왼쪽)과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 [중앙포토]

박근혜 전 대통령에 관한 의혹을 제기했다가 기소돼 결국 무죄 판결을 받은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왼쪽)과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 [중앙포토]

“저축은행 로비스트 박태규씨가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막역하게 만났다.”

전 정부 때 비판자들 대거 기소 #해마다 100명 안팎 실형 선고 #유엔 “표현의 자유 제약” 지적 #법무부는 “남용될 가능성 작아”

“영부인이 취임 넉 달도 안 돼 옷값만 수억을 쓰는 사치로 국민 원성을 사는 전형적인 갑질에 졸부 복부인 행태를 하고 있다.”

지난 12일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를 비난했던 두 사람의 희비가 엇갈렸다. 2012년 4월 새누리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박 전 대통령에게 고소당했던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같은 날 경찰은 한 시민단체의 고발로 수사해 온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두 사람의 혐의는 모두 허위 사실을 퍼뜨려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정치권력이 교체되자 ‘명예훼손죄’의 풍향계가 바뀌고 있다.

이명박 정부시절 검찰은 광우병 위험을 과장 보도했던 MBC PD 수첩 제작진, ‘천안함 좌초설’을 주장했던 신상철 서프라이즈 전 대표 등을 이 혐의로 기소했다. 박근혜 정부에선 대선 국면에서 박 전 대통령의 동생 지만씨가 5촌 조카 살인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던 주진우 시사인 기자와 김어준씨 등이 곤욕을 치렀다. 세월호 사건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서울지국장도 기소됐다. 이들은 대부분 수년 간의 재판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도 ‘명예훼손죄’ 똑같이 활용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양상은 변했다. 검찰은 2015년 민주당 대표이던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칭한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지난해 7월 불구속 기소했다. 문 대통령이 고소장을 낸 지 2년 여 만이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남 건호씨와 권양숙 여사의 고소에 따라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을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중이다. 페이스북에 올린 “노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씨와 아들이 박연차씨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금품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부부 싸움 끝에 권씨는 가출하고…(생략)”라는 글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청와대는 “탄저균 백신 500명 분을 구입해 청와대 직원들만 맞았다”는 의혹을 제기한 온라인 매체의 대표 등을 경찰에 고소했다. 경찰은 즉각 수사에 나섰다.

국제사회는 우리나라의 명예훼손죄가 정치적 반대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도구로 남용될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정례 검토(UPR, Universal Periodic Review)에서 명예훼손을 비범죄화하라고 주문했다. 218개 권고 사항 중 하나였다. 명예훼손을 손해배상의 문제로 다루라는 것이다. 2010년과 2013년 방한한 UN인권이사회 특별보고관들도 명예훼손죄가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부당하게 위축시킨다”(프랑크 라 뤼), “인권 옹호자들이 자기검열을 하게 만드는 등 표현의 자유를 제약한다”(마거릿 세카자)고 지적했다.

국제사회가 걱정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명예훼손 법제가 세계적 추세와는 다른 각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명예훼손죄는 형법이 1953년 제정될 때부터 있었다. 인터넷을 통한 명예훼손이 문제가 되자 2001년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정보통신망법)에 비슷한 처벌 규정이 도입됐다. 이 법제에 따르면 허위 사실 뿐만 아니라 진실한 사실을 표현해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고, 명예를 훼손할 위험성만 인정되면 명예가 훼손됐다는 결과를 입증하지 못해도 처벌된다. 정도가 심하면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영국은 형법상 명예훼손죄를 폐지했고, 프랑스는 징역형을 없앴고, 독일과 일본은 내용이 허위일 경우에만 처벌한다. 미국에는 처벌 규정이 남아있는 주가 있지만 처벌 사례가 흔치 않다.

2016년 검찰은 3만4372명의 명예훼손 피의자 중 2만2499명을 불기소 처분하고 9552명을 기소했다. 구속 기소된 사람은 472명이었다. 같은 해 1심 법원은 89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고소·고발이 크게 느는 가운데 소수에게 중형이 선고되는 구조다. 김성돈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힘없는 개인은 죄가 없어도 수사와 재판을 받는 고통이 두려워 입을 다물게 마련이다. 개인도 국가도 이 점을 노리고 고소를 남발한다. 최소한 진실한 사실을 말하는 경우를 처벌할 수 없게 하고 민사 분쟁으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다”고 말했다.

변호사 50%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2016년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설문조사에선 응답자 1944명 중 49.9%가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형법 307조 1항) 폐지에 찬성했고 16.5%(320명)는 이 죄에서 징역형을 없애는 데 동의했다. 야당 시절 민주당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지금도 국회에는 명예훼손죄에서 징역형을 삭제하자는 법안(유승희 의원)과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폐지안(금태섭 의원)이 제출돼 있다. 모두 대선 전에 제출된 법안들이다.

그러나 법무부는 최근 UN인권이사회의 권고에 대한 입장을 “형사정책적으로 범죄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정리했다. 형법 310조에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표현이라면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해두고 있어 남용 가능성이 적다는 게 핵심 근거다. 헌법재판소도 2016년 2월 인터넷에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한 경우를 처벌하는 정보통신망법 70조 1항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인터넷상의 비방글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가 생기는 상황 등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김대근 형사정책연구원 박사는 “SNS의 발달로 감추고 싶은 사실을 동의 없이 노출해 발생하는 피해를 입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정치적 남용 우려가 있지만 형사 처벌의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임장혁 변호사·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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