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자 가려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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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구걸하기 싫어 정치를 포기했다』는 친구가 있었다. 지난번 국회의원도 한번 해본 사람이다. 그는 정치에 맛을 들일만 할 때 그 유혹을 스스로 뿌리쳤다.
말이 쉽지 여간 힘든 용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호남출신인 그는 출신지에서의 평민당 공천제의를 끝내 마다했다.
『오죽하면 문전옥답까지 버렸겠소?』
자신의 표밭을 이렇게 비유한 그의 말엔 실감이 있었다. 멀쩡한 직장 다 버리고 4년 동안 국회의원 노릇한 소득은 돈 달라고 주위에 손 내미는데 이골난 것뿐이라고도 했다.
요즘 총선 풍경을 보면 그 친구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이제는 국회의원쯤 되려면 입만 커서는 안되고 손과 간도 함께 커야 할 것 같다.
선거는 겨우 초입인데 벌써 20부이니, 10낙이니 하는 얘기가 예사로 나온다. 보통사람들에겐 10억 원도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 두 배나 되는 20억 원은 뿌려야 당선이 된다니 기가 찰 일이다. 자기 집 금고 돈을 꺼내 쓴다고 해도 적지 않은 돈인데 남의 호주머니에서 그 많은 돈을 우려내려면 보통 배포로는 어림도 없다.
요즘 길거리에 나서면 탈법, 불법, 무법 아닌 것이 없다. 동네방네 칠갑을 해 놓은 포스터는 선거법 제 몇 조에서 허용했으며 현금봉투, 샴푸, 비누, 시계, 양산, 화장품, 수건, 여성내의 등을 유권자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법조문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도대체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시계는 지금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가. 2백 수십 년 전 영국을 방불케 하는 선거풍경이 요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1774년 영국총선 때는 매표주식회사까지 있었다. 「크리스천클럽」이라는 간판을 내건 이 회사는 표 값을 미리 매겨 유권자들로부터 사들이고, 그것을 출마자들에게 모개로 팔아 넘겼다.
그 무렵 서인도제도의 해군사령관을 기낸「코클랜드」는 미스터 모스트(Most=최고 씨)라는 별명을 듣고 있었다. 그때 시세로 가장 비싼 값을 주고 표를 사서 당선된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그런「미스터 모스트」는 예외 없이 떨어뜨려야 한다. 가장 돈 많이 뿌린 사람은 누구보다도 유권자들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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