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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실종, 감금, 암매장까지 '돈의 생로병사'… 5000원권 평균수명 65개월, 원래 몸값은 ‘영업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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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암호화폐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하지만 ‘돈’으로 인정할 것이냐에 대한 논란은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도 가상 공간에 존재하는 암호화폐는 실체가 없다.

[하현옥의 금융산책] #암호화폐 열풍 속 돈의 생로병사 #2016년 한 해 15조1000억원 발행 #카드·사이버 뱅킹 덕에 수명 늘어 #5만원권 17억3200만장 최다 유통 #회수율 58%, 일부 지하경제로 '잠수' #병들어 교환해 준 돈 지난해 46억원 #장판 밑 눌림과 습기로 부패 55% #죽은 돈은 분쇄 뒤 자재 등으로 활용

 하지만 우리가 돈이라고 부르는 화폐는 생명체처럼 태어나고 늙고 병들며 죽음을 맞는다. 경제의 윤활유이자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인 돈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따라가 봤다.

 생(生)-'현대의 연금술'로 태어나다

 화폐는 중앙은행의 마법으로 태어난다. 금속을 사용한 주화는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반면 은행권으로 불리는 지폐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이 종이 돈에 가치를 부여하는 마술사가 중앙은행이다. 오늘날의 화폐제도가 ‘현대의 연금술’로 불리고 중앙은행을 ‘신전(神殿)’에 비유하는 이유다.

 돈이 태어나는 순간, 중앙은행은 상당한 이익을 챙긴다. 이른바 ‘세뇨리지(주조차익)’다. 화폐의 액면가에서 제조 비용을 뺀 이익이다. 화폐를 발행하는 한국은행과 제조를 맡는 한국조폐공사는 제조원가를 공개하지 않는다. 영업 비밀이다. 위조 가능성을 줄이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나마 알려진 건 10원짜리 동전의 제조원가 정도다. 구릿값과 금형 등에 들어가는 각종 비용을 따지면 30~40원 수준이다. 배보다 배꼽이 큰 셈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통상적으로는 화폐의 액면가보다 주조 비용이 낮다.

그래픽=이현민 디자이너

그래픽=이현민 디자이너

 2016년 한국은행은 15조1000억원의 돈을 발행했다. 장수로는 23억2100만장이다. 새로운 화폐 수급 계획은 연간 단위로 짠다. 올해 우리가 쓰는 신권은 1년 전에 주문한 것이다.

 화폐 수요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만큼 통상 2~3개월의 재고를 유지한다. 연간 필요 물량을 조폐공사에 주문하고 납품 기일을 정한다. 조폐공사에서 찍어낸 화폐는 한국은행 본점과 지점으로 옮겨지고 금융기관의 지급 요청에 따라 출납창구를 통해 발행된다. 화폐가 태어나는 것이다.

 화폐는 ‘신분 세탁’도 가능하다. 시중에 유통됐더라도 한국은행의 문턱을 다시 넘은 순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돈으로 신분이 바뀐다. ‘돈의 주민등록’이 말소되는 셈이다.

 김동균 한국은행 발권정책팀장은 “화폐 재고에는 새로 찍어낸 돈과 한국은행으로 다시 돌아온 돈이 모두 포함된다”며 “회수된 돈은 미발행화폐로 분류된다”고 말했다.

 로(老)-세상을 돌고 돌며 늙다

 한국은행의 문을 나선 돈은 세상을 돌고 돈다. 사람의 손을 타면서 늙어간다.

 한국은행이 시중에 공급한 화폐 중 환수한 돈을 제외하고 시중에 남은 돈인 화폐발행잔액으 따지면 지난해 말 현재 시중에 돌아다니는 지폐 중 가장 많은 것은 5만원권이다. 장수로는 17억3200만장(86조5779억원)이 시중에 풀려 있다. 액수로 따진 잔액 비중도 82.13%로 압도적이다.

 1만원권(15억8600만장)과 1000원권(15억8000만장)은 5만원권 보다 적지만 장수로는 시중에 비슷한 수준으로 남아 있다. 5000원권 상대적으로 장수가 적어 2억7700만장에 불과하다.

 이렇게 세상을 떠도는 화폐도 수명이 있다. 유통수명이다. 5000원권의 평균 유통수명은 5년 5개월(65개월)이고 1000원권은 3년 4개월(40개월)이다. 1만원권과 2009년 첫 선을 보인 5만원권의 유통수명은 아직 연구되지 않았다.

 김태형 한국은행 화폐연구팀장은 “지폐의 용지 재질은 모두 동일하지만 권종별 유통수명이 다른 것은 사용 방식의 차이 때문으로 추정된다”며 “1000원권은 잔돈으로 많이 쓰이다 보니 손을 많이 타면서 수명이 짧다”고 말했다.

 신용카드 사용이 늘고 인터넷ㆍ모바일 뱅킹의 보급으로 화폐 사용 빈도가 낮아지며 유통 수명도 길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늙어가는 과정에 각종 사건 사고도 발생하기 마련이다. 화폐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가장 잦은 사고는 ‘실종’이다. 환수율로 따지면 지난해에만 5796만2000개의 동전이 사라졌다.

 주화는 반영구적이지만 저금통이나 서랍장 등에서 잠자고 있는 동전이 늘어나며 한동안 환수율은 10~20%대에 불과했다. 2016년 말 기준으로 국민 1인당 동전보유량은 439개로 추산됐다. 하지만 지난해 동전 발행이 줄어들면서 환수율이 75.5%로 급등했다.

 지폐의 경우에는 금고 등에 ‘감금’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심지어 ‘암매장’당하는 얄궂은 운명도 있다. 2011년 전북 김제시의 마늘밭에서 110억원어치의 5만원권 돈다발이 발견된 것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지폐 중 환수율이 가장 떨어지는 것은 5만원권이다. 지난해 5만원권의 환수율은 57.8%에 불과했다. 한국은행으로 다시 돌아오는 돈이 절반을 조금 넘는 셈이다. 1만원권의 환수율(103.1%)를 넘는 데 비해 ‘잠수’를 탄 5만원권이 늘어나며 고액권이 지하경제로 흘러 들어간다는 지적도 나온다.

 병(病)-망가지고 병들고 수술대에 오르기도

 돈도 병든다. 노화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사용자들이 돈을 부주의하게 다루며 망가지는 돈도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망가진 돈은 치료를 받을 수 없지만 몸을 바꿔서 생명을 부지하기도 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손상 화폐로 교환된 돈은 46억1000만원이다.

 돈이 병을 얻은 이유도 다양하다. 가장 많은 경우는 장판 밑 눌림이나 습기에 의한 부패 등으로 망가진 경우다. 전체 교환액의 54.7%(11억6000만원)가 이 경우에 해당했다. 불에 탄 경우(33.9%)와 세탁 또는 세단기 투입(11.4%)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래픽=이현민 디자이너

그래픽=이현민 디자이너

 돈을 병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위조지폐다. 화폐의 세계에서 암적인 존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발견된 위조지폐는 1609장으로 지난해보다 231장(16.8%) 늘었다.

 발병률에 비견할 수 있을 유통 은행권 백만장당 위조지폐 발견장수는 지난해 0.3장에 불과했다. 이는 영국(91.8장)과 멕시코(61.8장)와 발견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암과도 같은 위조지폐가 발생해 지속해서 문제가 되면 기존 은행권은 수술대에 오른다. 위조방지 장치를 더 강화한 새로운 은행권이 태어난다.

 김태형 팀장은 “경찰 등 수사기관과 위조지폐 정보를 공유하고, 시중에서 발견된 위조지폐는 수사가 끝나면 전량 한국은행으로 돌아온다”며 “이들 위조지폐를 연구해 대응 방법을 모색한다”고 말했다.

 사(死)-돈, 생을 마감하다

 돈이 천수를 누리기는 쉽지 않다. 수명을 다한 자연사도 있지만 낙서나 구멍이 뚫려 사망 진단을 받기도 한다.

 한국은행에 환수된 화폐는 ‘정사(整査)’과정을 거쳐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사용화폐와 사용할 수 없는 손상화폐 구분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3조7693억원의 화폐가 사망 선고를 받고 폐기처분됐다. 지폐(은행권) 5억3000만장(3조7668억원)과 주화 7000개(25억원)가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죽음을 맞은 화폐를 새로 대체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은 617억원이다.

 죽는다고 세상에서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김광명 한국은행 발권기획팀장은 “손상화폐는 일단 분쇄한 뒤 건축자재나 자동차 방지 패드 등을 만드는 데 재활용되기도 한다”며 “재활용 업체가 가져가지 않은 것은 소각한다”고 말했다.

 화폐의 존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신용카드를 비롯한 다양한 지급 수단이 등장한 데다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암호화폐까지 등장하며 기존의 화폐의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급수단별 이용 비중. 자료: 한국은행

지급수단별 이용 비중. 자료: 한국은행

 한국은행의 ‘2016년 지급결제보고서’에 따르면 지급수단별 이용기준(금액기준)으로 따지면 현금은 13.6%에 불과했다. 신용카드(54.8%), 체크ㆍ직불카드(16.2%), 계좌이체(15.2%)에 못 미쳤다.

 암호화폐의 위협은 더욱 거세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지난 18일 기준 전 세계 1448개의 암호화폐 시가총액은 총 5300억 달러에 이른다. 중앙은행도 지폐나 주화처럼 액면 가격이 정해져 있고 법정통화로 효력을 갖는 디지털 화폐 발행을 검토하고 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화폐에 건 마법…위조방지 장치 

 종이를 돈으로 만드는 ‘연금술사’인 중앙은행은 세상에 태어난 화폐에 마법을 걸어 놓는다. 위조지폐가 범람하는 걸 막기 위한 위조방지장치다.

 한국은행도 마찬가지다. 은행권(지폐)에는 각종 위조방지장치가 있다. 5만원권의 위조방지장치 중 대표적인 것은 4가지 정도다.

5만원권 위조방지장치. 자료: 한국은행

5만원권 위조방지장치. 자료: 한국은행

  지폐의 가장 왼쪽에는 띠형 홀로그램이 있다. 특수필름의 띠로 지폐를 기울여보면 보는 각도에 따라 한국 지도와 태극, 4괘 무늬가 번갈아 보인다.

 그 옆에는 숨은 그림을 찾을 수 있다. 빛에 비춰보면 신사임당의 모습이 보인다.

 숨은 그림의 오른쪽에는 입체형 부분노출온선이 있다. 지폐를 기울이면 노출온선 안에 있는 태극무늬가 움직여 보인다.

 지폐의 오른쪽 부분에 있는 볼록 인쇄다. 신사임당 초상과 월매도, 그 옆의 문자와 숫자 부위를 만져보면 오돌토돌한 감촉을 느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다. 지폐에는 육안으로는 잘 확인되지 않고 확대경 등을 이용해야만 확인한 미세문자(Micro Lettering)가 있다. 컬러복사나 컬러프린터로 위조하면 이 미세문자가 선이나 점선으로 나타나 위조지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어 알파벳과 숫자로 이뤄진 기번호는 ‘주민등록번호’처럼 지폐 고유에 매겨진 번호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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