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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 삶과 꿈을 마술로 이야기하는 다문화 여성들

중앙일보

입력

익산 다스토리 다문화 마술단 소속 다문화 가정 여성들이 저마다 개성 있는 복장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전북도]

익산 다스토리 다문화 마술단 소속 다문화 가정 여성들이 저마다 개성 있는 복장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전북도]

"5초 안에 이 상자를 열면 이 안에 있는 사탕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22일 오후 1시 익산시 모현동 교육마술연구센터 3층. 홍미선(43) 마술사가 상자를 이용해 마술을 선보인다. 앞에 있던 여성 7명이 아무리 열려고 해도 상자는 꿈쩍도 않는다. 홍 마술사가 "열려라, 참깨!"라고 소리치자 상자가 바로 열린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여성들은 "신기하다"며 손뼉을 친다.

전북 익산 다스토리 다문화 마술단 #중국·베트남 등 8명, 한국인 2명으로 구성 #익산시 다문화가족센터 '자존감 회복' 사업 #다문화 여성들로 이뤄진 국내 최초 마술단 #홍미선 마술사 지도로 지난해 6개월간 연습 #화술·익살스러운 표정 배우며 성격 밝아져 #방과후 중국어 수업서 마술 활용해 큰 호응 #소아마비 단원 "'마술텔링'으로 용기 줄 것"

외국에서 한국에 시집 온 다문화 가정 여성들로 이뤄진 '익산 다(多)스토리 다문화 마술단'(이하 다스토리 마술단)의 수업 모습이다. 중국과 베트남 등 외국인 여성 8명과 한국인 여성 2명 등 모두 10명으로 구성됐다. 다스토리 마술단은 지난해 5월 익산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홍 마술사가 센터장으로 있는 교육마술연구센터와 손잡고 다문화 가정 여성들의 자존감 회복을 위해 추진한 사업의 하나다.

홍미선 마술사가 다문화 가정 여성들에게 마술을 가르치고 있다. [사진 홍미선 마술사]

홍미선 마술사가 다문화 가정 여성들에게 마술을 가르치고 있다. [사진 홍미선 마술사]

단원들은 익산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6개월간 매주 월요일마다 하루 3시간씩 홍 마술사의 지도를 받았다. 공식 수업은 지난해 10월 말로 끝났지만 다스토리 마술단원들은 여전히 교육마술연구센터에 모여 홍 마술사로부터 새로운 마술을 익히고 있다. 국내에서 다문화 가정 여성들로 이뤄진 마술단은 다스토리 마술단이 처음이라고 한다.

교육마술연구센터에 따르면 아시아 출신이 대부분인 다문화 가정 여성들은 무시받기 일쑤다.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어눌해서다. 다문화 가정 여성들도 한국인들에게 쉽게 다가가질 못한다. 외국인 어머니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자녀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홍미선 마술사가 다문화 가정 여성들에게 마술을 가르치고 있다. [사진 홍미선 마술사]

홍미선 마술사가 다문화 가정 여성들에게 마술을 가르치고 있다. [사진 홍미선 마술사]

익산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고혜지씨는 "단원들이 구사할 수 있는 마술은 20여 가지 정도지만 공연에 필요한 몸동작이나 익살스러운 표정을 배우며 성격이 밝아졌다"고 전했다. 동화구현 강사이자 방송국 성우로도 활동하는 홍 마술사는 다문화언어지도사이기도 하다. 그는 2009년 마술과 화술(話術)을 결합한 마술 스피치(speech)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홍 마술사는 "마술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짧은 시간에 동기를 유발하는 데 좋은 매개체다. 아무 의욕이 없던 사람도 마술을 배워 사람들 앞에 서보면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과 산업재해 피해자, 우울증 환자, 학교폭력 가해자 및 피해자, 자살지수 높은 청소년 등에 대한 마술의 심리 치료 효과는 탁월하다"고 덧붙였다.

홍미선 마술사. [사진 홍미선 마술사]

홍미선 마술사. [사진 홍미선 마술사]

한국말이 서툰 다문화 가정 여성들에게 마술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홍 마술사는 "처음엔 어려운 단어도 많고, 발음도 서툴러 화술을 익히는 데 애를 먹었다"면서도 "'외국인은 발음이 어설퍼도 외려 귀엽다'며 자신감을 북돋아 줬다"고 말했다. 단원들은 마술이 몸에 익으면서 자신감도 붙고 한국어 실력도 늘었다. 홍 마술사는 "단원들이 교회 등 종교 행사에 가서도 먼저 말을 걸거나 마술을 보여주니 호감을 산다. 가족들도 마술을 하는 아내와 엄마를 대단하게 바라본다. 단원들도 더 신나서 마술을 배운다"고 했다.

단원들 대부분은 한국인 남편 혼자 버는 외벌이라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은 편이다. 홍 마술사는 "단원 중엔 대학을 나오고 머리 좋은 여성이 많아 식당 아르바이트 등을 하기엔 아깝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다스토리 마술단원 3명을 초등학교 돌봄교사와 풍선아트 강사, 마술 강사로 취업시켰다.

한 다문화 가정 여성이 마술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 홍미선 마술사]

한 다문화 가정 여성이 마술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 홍미선 마술사]

중국에서 2008년 한국에 건너온 육한진(32)씨도 초등학교 1학년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두 아들(7세, 3세)에게 알려주려고 마술을 배웠다가 일자리까지 얻었다. 초등학교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마술을 활용해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가르치는 일이다. 홍 마술사가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마술 치료를 할 때 통역을 하거나 보조강사를 맡기도 한다. 육씨는 "마술을 하면서 일도 구해서 좋다"고 말했다.

'다(多)스토리'라는 마술단 이름처럼 단원들은 마술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복장도 마술 내용에 맞게 맞추고 음악도 이야기와 어울리게 고른다. 홍 마술사는 "누구를 대상으로 몇 분짜리 공연을 한다고 하면 공연이 가능한 마술들을 적어 놓고 단원들끼리 어떤 마술사가 무슨 마술을 하는 게 효과적인지 정하고, 음악이 들어갈 부분과 스토리가 들어갈 부분 등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원광보건대에 다니는 중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마술 치료 프로그램 모습. [사진 홍미선 마술사]

원광보건대에 다니는 중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마술 치료 프로그램 모습. [사진 홍미선 마술사]

중국 출신인 김광매(38)씨는 중학교 방과후 강사로 중국어를 가르칠 때 마술을 십분 활용한다. 이런 식이다. "저는 중국에서 시집을 왔는데 옛날엔 우리 남편 나라엔 글이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책을 보여주며) 그래서 우리나라(중국) 한자를 빌려 썼죠. (백지 상태였던 책이 김씨가 책장을 넘기자 한자가 나온다.) 옛날에 세종대왕님이 한글을 만드셔서 제가 한국에 와서 글을 배우기가 참 쉬웠습니다." 김씨는 "중국어만 가르치면 아이들이 지루해할 텐데 마술을 활용하니 더 쉽고 재미있게 말을 배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스토리 마술단은 그동안 두 차례 공식 공연을 치렀다. 지난해 10월 28일 익산시가 주최한 '다문화 사랑축제'가 첫 무대다. 공연을 앞두고는 2주 전부터 거의 매일 하루 4~5시간씩 맹연습을 했다고 한다. 의상부터 음악·표정·손짓·몸짓까지 세세한 부분까지 손발을 맞췄다. 단원들은 시내 번화가에 마술복을 차려 입고 나가 마술을 펼치는 '버스킹(거리 공연)'을 하며 자신감을 키웠다. 김광매씨 등 마술단의 에이스 4명이 꾸민 15분짜리 마술 공연은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마술 수준이 높고 재미있다"는 평이 많았다.

다스토리 마술단 단원들이 마술을 연습하고 있다. [사진 홍미선 마술사]

다스토리 마술단 단원들이 마술을 연습하고 있다. [사진 홍미선 마술사]

다스토리 마술단원들은 홍 마술사가 마술 교육생들과 만든 '홍쌤과 힐링 마술봉사단'과 함께 또는 개별적으로 고아원과 양로원·노인요양시설 등을 찾아 마술 봉사를 하고 있다. 마술을 배우며 자긍심을 얻은 다문화 가정 여성들이 소외된 이웃에게 재능을 베풀고 있는 셈이다.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 한국인 단원 김효경(55)씨도 마술을 배우면서 꿈이 생겼다. 그와 처지가 비슷한 장애인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마술과 곁들여 보여주는 것이다. 고등학교 음악 교사였던 김씨는 "내가 살아온 얘기를 마술로 표현하는 '마술텔링'을 통해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익산=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홍미선 마술사(왼쪽)와 다스토리 마술단을 지원한 정헌율 익산시장(오른쪽)이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고 있다. [사진 홍미선 마술사]

홍미선 마술사(왼쪽)와 다스토리 마술단을 지원한 정헌율 익산시장(오른쪽)이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고 있다. [사진 홍미선 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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