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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을 해부하면 아베의 일본이 드러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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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150주년 메이지유신과 사이고 다카모리

가고시마시 시로야마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받침 대에 ‘せごどん(세고돈, 사이고 전하)’은 사투리 애칭. 양쪽 어깨에는 사쓰마번 시마즈 가문 문양이 있다.

가고시마시 시로야마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받침 대에 ‘せごどん(세고돈, 사이고 전하)’은 사투리 애칭. 양쪽 어깨에는 사쓰마번 시마즈 가문 문양이 있다.

1868년 일본은 천지개벽을 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신세계다. 올해가 유신 150주년. 아베 신조 총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150년 전 메이지 일본의 새로운 나라 만들기는··· 국난으로 부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근대화를 단숨에 추진했다.”(1일 신년 소감)

아베 “메이지 새 나라 만들기는 #위기 극복 위해 단숨에 근대화” #1등 공신서 반역 수괴 된 '세고돈' #올해 NHK 대하드라마로 그려 #'사무라이식 미학' 향수 엿보여 #정한론은 일본의 지정학적 본능 #지피지기와 투지로 잠재워야

일본 공영방송 NHK도 유신 150주년을 조명한다. ‘세고돈(西鄕どん)’은 2018년 대하드라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이하 다카모리)의 이야기다. 그는 사쓰마(薩摩)번 출신.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 규슈 남쪽 끝)현이다. ‘사이고’는 그곳 사투리로 ‘세고(せご)’.

유신의 주력은 사쓰마와 조슈(長州, 야마구치현)번 출신들이다. 다카모리는 최고 공신이다. 첫 육군대장의 근위도독. 메이지 일왕(일본 천황)의 신뢰는 압도적이었다. 그런 삶이 반역의 괴수로 반전한다. 그의 할복은 사무라이의 비장미로 기록된다. 몰락은 정한론(征韓論, 조선 정복)의 국론 갈등에서 비롯됐다. 정한론은 냉소와 경멸을 일으킨다. 그럴수록 메이지유신을 알아야 한다. 그 속에 아베 정치의 원형도 존재한다.

나의 일본 근대사 추적은 조슈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으로 본격화했다. “쇼인의 시골 학당, 메이지유신의 주역 쏟아내다. 아베의 역사 도발엔 쇼인의 그림자”가 제목이다(2014년 1월 18일 중앙일보 14~16면). 쇼인은 일본 국수주의 우익의 사상적 거점. 사쓰마의 위상은 그에 못지않다. 가지야(加治屋) 마을이 그 면모를 뿜어낸다. 가고시마시 중앙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유신 후루사토(ふるさと, 고향)관’이 있다. 그 박물관은 자부심을 드러낸다. 16명의 위인 탄생 지도가 있다.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이상 유신삼걸)·구로다 기요타카(총리)·오야마 이와오(참모총장)·도고 헤이하치로(연합함대 사령장관)···. 인물군은 조슈의 하기(萩)와 비교된다. 쇼인의 학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도 인재의 대량 배출지다. 두 지역 한 마을이 메이지 시대를 장악했다(박스 참조). 그것은 교육의 위력 덕분이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할복과 가이샤쿠(그림).

사이고 다카모리의 할복과 가이샤쿠(그림).

NHK ‘세고돈’ 첫 회(7일)도 고쥬(鄕中) 교육이다. 박물관 안내문은 이렇다. “스승은 없다. 선배가 후배를 지도한다. 학문·훈육 외에 스모·검술·체력을 단련한다. 초점은 실용적 인간 양성.” 쇼인의 교육은 혁파의 상상력과 의지의 배양이다. 고쥬의 실용성과 쇼카손주쿠의 상상력은 합치고 충돌했다. 1853년 격랑이 시작됐다. 미국 페리의 흑선함대 출몰이다. 쇼군(將軍)의 막부통치 시대였다. 번의 영주 다이묘의 자치권은 상당했다. 260개 번 중에서 사쓰마와 조슈가 강력했다. 국론이 분열됐다. 막부 타도의 존왕(尊王), 개방의 양이(攘夷)논쟁은 험악했다. 피가 피를 부르는 유혈이다.

다카모리의 삶(1828~1877)은 격렬하게 진행됐다. 집안 내력은 하급무사. 그는 거한이다. 키 178㎝, 몸무게 108~120㎏(당시 일본 남자 평균 키 156㎝). 1864년 그의 지위는 교토의 사쓰마 군부역. 조슈와 막부가 충돌했다. 조슈는 존왕파의 선두였다. 막부의 주력은 아이즈(會津, 후쿠시마현)번. 아이즈의 별동대 신세구미가 조슈 지사들을 참살했다. 조슈는 반격했다(금문의 변). 다카모리의 사쓰마는 아이즈와 함께 조슈를 물리쳤다.

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

다카모리는 막부의 무망한 장래를 봤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등장한다. 료마는 도사(고치현)번의 탈번(脫藩) 낭인. 그의 비전은 삿초(薩長, 사쓰마+조슈)동맹이었다. 다카모리는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와 뭉쳤다. 료마의 주선이다. 료마는 다카모리의 포용력을 격찬했다. “종이다. 작게 치면 작게, 크게 치면 크게 울린다.” 조슈는 승기를 잡았다.

도쿠가와 막부시대 264년이 마감됐다. 대정봉환(大政奉還)→왕정복고의 대호령(大号令, 1868년 1월 3일)이 이어졌다. 천황 친정으로 바뀌었다. 친(親)막부군의 저항(보신전쟁)은 거셌다. 다카모리의 평정 역할은 뚜렷했다. 에도(도쿄)의 무혈입성도 그의 작품. 폐번치현(廢藩置縣, 번을 없애고 현 설치)은 신질서의 혁명적 조치였다. 그는 어친병 도독의 위세로 밀어붙였다.

이와쿠라 사절단.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중앙포토]

이와쿠라 사절단.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중앙포토]

폐도령과 징병령이 발동됐다. 사무라이들의 박탈감은 깊어졌다. 다카모리는 집단분노의 분출구로 정한론을 삼았다. ‘정한’은 일본의 본능이다. 팽창·침략의 지정학적 충동이다. 대응은 부국강병뿐이다. 조선은 문약(文弱)과 쇄국탓에 대처에 실패했다. 1873년 9월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이 귀국했다. 사절단은 내치 우선을 주장했다. 오쿠보 도시미치가 앞장섰다. 그는 다카모리의 죽마고우. 정한론에 제동이 걸렸다. 다카모리는 권력 무대(참의, 근위도독)에서 자진 퇴장했다.

다카모리는 낙향했다. 가고시마에 사학교를 세웠다. 도쿄의 신정부는 가고시마 창고의 탄약·병기를 옮기려 했다. 사학교 측은 ‘다카모리 암살 음모’로 판단했다. 1877년 2월 사학교 군대는 거병했다. 세이난(西南)전쟁의 시작이다. 근대 일본의 최대·최후 내전이다. 사쓰마 군대 1만5000명이 규슈 북쪽으로 진군했다. 도쿄 정부는 진압에 나섰다. 정토(征討)참군은 조슈 출신 야마가타 아리토모. 첫 격전지는 구마모토성. 사쓰마 군대가 포위했다. 진대(鎮臺)의 관군(4000명)은 농성으로 버텼다. 관군의 주력은 징병령의 농민 병사. 구마모토성은 난공불락이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구축한 진지다. 그는 임진왜란의 잔혹한 악명이다. 관군 1만5000명이 추가 됐다.

구마모토 북쪽의 다바루자카(田原坂). 거기서 양측은 대치했다. 나는 고마타 슈이치(56)와 함께 그곳을 찾았다. 그는 규슈의 향토역사잡지를 내고 있다. 언덕(높이 55m) 사이로 깊지만 완만한 비탈길(2㎞)이 펼쳐진다. 기습·은폐의 전투를 유혹할 만한 형세다. 다바루자카 기록관은 흥미롭다. “전투 17일간 찬비가 내렸다. 사쓰마군의 구식 총은 젖었다. 백병전으로 전환했다. 칼이 쓰인 마지막 전투.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배경이다.” 사쓰마의 백병전은 칼을 든 발도(抜刀) 공격이다. 검법은 지겐류(示現, 自顯流). 극단적 단순성을 추구한다. 칼을 높이 든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간다. 단칼에 상대를 벤다. 일격필살의 절정이다. “첫 번째 칼을 의심하지 말라, 두 번째 칼은 패배다(一刀を疑わず 二刀則敗).” 전설의 검술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화려함과 다르다. 서민·농민의 관군 병사들은 흩어졌다. 하지만 사쓰마군은 장비와 탄환 부족에 시달렸다. 사쓰마 군대는 후퇴했다.

징병령 군대는 환호했다. 그것은 쇼인의 ‘초망굴기(草莽崛起)’ 기세다. 초망은 민초의 백성이다. 초망굴기는 열린 개방이다. 사쓰마의 무사 문화는 배타적인 엘리트주의. 평민 군대가 사무라이의 명성을 깼다. 사쓰마군은 가고시마로 퇴각했다. 남은 인원은 400여 명. 시로야마(城山) 언덕에서 최후의 응전을 했다. 정부군이 포위했다. 다카모리도 유탄에 맞았다. 동굴에 들어갔다.

그는 자결의 의식을 치렀다(1877년 9월). 셋푸쿠(切腹, 단도로 배를 가름)→가이샤쿠(介錯, 배를 가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뒤에서 칼로 목을 쳐 줌)로 진행됐다. 향토사학자 고마타는 “다카모리는 사무라이들의 분노·좌절감을 자신의 죽음으로 만든 용광로에 넣어 용해·증발시켰다. 유신의 장애물들이 사라졌다.” 그 의식은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의 ‘죽음의 미학’으로 기억된다. 일본 역사는 장렬함에 신화를 주입했다.

그는 12년 뒤 사면됐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 동상도 세워졌다. 그의 좌우명은 ‘경천애인(敬天愛人)’. 세이난 전쟁의 전사자는 1만4000여 명(관군 6900명, 사쓰마 7100명) 헛된 죽음은 무수했다. 그것은 ‘경천애인’의 추락이다. 고마타는 “동일본 쪽 많은 사람은 다카모리의 여러 부분을 ‘삿초역사관’에 의한 각색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7일 쇼인의 언어를 꺼냈다. “영욕(栄辱)에 의해 초심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 초지일관의 다짐이다. 핵심은 ‘전쟁 가능한 국가’로의 개헌일 것이다. 그의 야망은 ‘제2의 유신’ 도모로 비친다. 박근혜 정권의 대일 외교는 혼선과 난맥이었다. 일본 역사에 둔감한 탓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투 트랙 분리는 적절하다(10일 회견). “역사(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진실을 훼손하지 않고, 동시에 미래지향적 협력·발전을 이룬다.” 박정희·김종필, 김대중 시대의 대일 외교는 정교했다. 그들은 일본의 장단점에 익숙했다. 지피지기가 용일(用日)의 지혜와 극일의 투지를 생산한다.

유신 설계자 도시미치 피살로 이토 히로부미, 권력공백 차지

세이난 전쟁 격전지 다바루자카에서 관군과 사쓰마 발도대 전투. [중앙포토]

세이난 전쟁 격전지 다바루자카에서 관군과 사쓰마 발도대 전투. [중앙포토]

김종필(JP) 전 총리는 일본을 안다. 그는 메이지유신 삼걸 중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최고로 친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은 가당치도 않았고 행동으로 옮길 만한 계획도 별로 없었어. 사무라이식 죽음으로 역사의 향수로 남아 있는 거야. 메이지유신의 개혁 조치는 도시미치의 작품이지.”

내전(세이난 전쟁)은 두 사람을 갈랐다. 도시미치는 메이지 신정부의 키플레이어(참의·내무경)였다. 그는 전쟁 8개월 뒤 암살당했다. 다카모리 추종 자객들의 칼에 스러졌다.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 시대는 칼자국이 난무했다. 요절·비명횡사·참살의 연속이었다. 신분 상승은 비극 속에서 얻어진다. 행운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초대 총리)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잡았다. 둘은 쇼인의 제자다.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병사)가 이끈 ‘기병대(奇兵隊)’ 출신이다. 기병대는 평민을 앞세운 기이한 부대다. 유신 삼걸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병사했다. 그는 조슈 출신의 맏형. 다카요시와 도시미치의 공백은 히로부미의 몫이었다. JP의 말대로 메이지 원훈(元勳)은 우리에겐 원흉이다.

지도

지도

아리토모는 메이지 시대 군부의 간판이다. 다카모리의 몰락(1877년) 덕분에 그의 존재감은 뚜렷해졌다. 그것으로 조슈가 육군의 주류로 나섰다. 사쓰마는 해군 쪽으로 이동했다. 1869년 유신의 공신 서열이 매겨졌다. 다카모리는 번사(藩士)로서 단연 1등(상전록 2000석). 아리토모는 600석. 조슈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가 사무라이의 칼에 맞았다. 징병령을 주도한 전략가였다. 그의 동상은 야스쿠니 신사 앞에 있다. 그의 죽음으로 아리토모의 위상은 굳어졌다.

메이지유신 양대 웅번(사쓰마·조슈)의 군·정 장악

메이지유신 양대 웅번(사쓰마·조슈)의 군·정 장악

유신 초기 내각과 군부는 조슈와 사쓰마의 독점이었다. 1~10대(8대 제외) 총리를 양 지역 사람들이 번갈아 맡았다. 메이지유신 50주년(데라우치 마사타케), 100주년(사토 에이사쿠), 150주년(아베 신조) 모두 야마구치현(옛 조슈) 출신이다. 쇼카손주쿠 입구에 기념 돌비석이 있다. ‘明治維新 胎動之地(명치유신 태동지지)’라고 써 있다. 100주년 때 사토 총리가 썼다. 사쓰마 출신 첫 총리는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 그는 강화도조약 때 일본 전권 대표였다.

가고시마·구마모토·하기=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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