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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1000살 정돈 돼야…신비한 고목(古木)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하늘로 향할 것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경기도 이천 백사면 도립리 반룡송 가지. [사진 문화재청]

하늘로 향할 것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경기도 이천 백사면 도립리 반룡송 가지. [사진 문화재청]

지난 17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어산마을. 승용차 한 대 지날 정도의 좁은 농로를 따라 200m 정도 들어가면 ‘반룡송(蟠龍松)’을 만날 수 있다. 키 4.25m로 큰 편은 아니지만, 중간쯤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자라 나무 폭이 12.5m에 이른다. 밑동 부분은 바닥을 따라 비스듬하게 누웠는데, 원줄기는 하늘을 향해 자랐다. 원줄기서 뻗은 가지 중에는 똬리를 튼 듯 기묘하게 휘어진 게 눈에 띈다.

"하늘 오르기 전 용"이라는 이천 반룡송 #신라말 '위인' 탄생 예언하면서 심어 #껍질 벗기면 몹쓸병 얻는다는 속설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수령은 1100년 #고종 승하 때 커다란 가지 부러졌다고 #화성 물푸레나무 등도 이름난 노거수 #"오래 산 나무 넘어 우리문화의 보고"

문화재청 등에 따르면 옛사람들은 이 모습이 꼭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 같다’고 해 반룡송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蟠’(반)의 사전적 의미는 서리다, 두르다 등이다. 반룡송은 또 일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이라며 만년송(萬年松)으로도 불렸다. 지역에서는 뱀솔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반룡송과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신라 말기의 승려이자 풍수설의 대가로 알려진 도선국사(827~898년)가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심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온다. 993년 거란으로부터 압록강 남쪽의 옛 고구려 영토를 되찾은 외교관 서희 선생이 이천 출신이다. 도선의 마지막 생에 심었다고 가정해도 수령이 무려 1119년이다. 산림 학계에서는 대체로 나이를 850년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룡송의 껍질을 벗긴 사람이 몹쓸 병을 얻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구전되고 있다.

고려시대 외교관 서희 선생이 이천 출신이다. 거란과의 협상에서 옛 고구려 땅을 되찾았다. 사진은 이천 서희역사관 모습. [사진 경기문화재단]

고려시대 외교관 서희 선생이 이천 출신이다. 거란과의 협상에서 옛 고구려 땅을 되찾았다. 사진은 이천 서희역사관 모습. [사진 경기문화재단]

반룡송을 설명하는 안내판 옆에는 무속 행위를 금지하는 경고문이 있다. 지난해 4월 이천시 내 대표 지역행사인 ‘산수유 축제’를 앞두고 백사면사무소 직원들이 무속 행위 단속까지 나섰다고 하니, 신성시된 나무임은 분명해 보인다. 천연기념물로는 1996년 말 지정(제381호)됐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은 노거수(老巨樹)로 분류된다.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보전가치를 지닌 나무를 나누는 점잖은 분류명칭이다. 경기도 내 대표 노거수로 양평군 용문면 용문사의 은행나무도 이름 나 있다.

이 은행나무의 높이는 39.2m다. 국내 최장이다. 사람이 배 둘레를 재듯 나무는 사람의 가슴높이에서 둘레를 잰다. 흉고라고 불리는데 11.2m에 이른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조선거수노수명목지(朝鮮巨樹老樹名木誌)』에는 높이가 63.6m로 기록돼 있다. 키가 상당히 준건데 다행히 1962년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와 지금의 키는 비슷하다고 한다.

1100년 세월을 견딘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고종이 승하했을 때 가지가 부러졌다고 한다. [사진 문화재청]

1100년 세월을 견딘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고종이 승하했을 때 가지가 부러졌다고 한다. [사진 문화재청]

수령은 1100년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979년 사망)의 세자인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한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 심었다는 설과 신라 의상대사(625~702년)가 꽂은 지팡이가 자라 지금의 나무에 이르렀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은행나무가 있는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년)에 세워졌다. 이를 근거로도 나이를 짐작하고 있다. 세종대왕은 용문사 은행나무에 현재의 차관보급인 정삼품에 해당하는 관직을 하사하기도 했다.

국내 노거수 연구 권위자인 이경준 전 서울대 교수의『한국의 천연기념물 -노거수 편』을 보면, 용문사 은행나무와 얽힌 신비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나라에 우환이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 이를 알렸다는 것이다.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고종이 승하(1918년)했을 때 커다란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또 톱으로 나무를 자르려 했는데 붉은 피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쳤다는 이야기, 일제강점기 때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이 절에 불을 질렀을 때도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 등 다양하다.

수령 360년 화성시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청년에 속한다. 6.25전쟁 전까지 나무 앞에서 마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김민욱 기자

수령 360년 화성시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청년에 속한다. 6.25전쟁 전까지 나무 앞에서 마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김민욱 기자

화성 물푸레나무는 노거수 중 가장 굵다. [사진 문화재청]

화성 물푸레나무는 노거수 중 가장 굵다. [사진 문화재청]

양주시 남면 황방리 느티나무도 850년간 이 땅을 묵묵히 지켜왔다. 모진 세월 지역 주민들에게 편안한 안식처였다.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수령 360년의 ‘청년’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둘레가 가장 큰(4.6m) 나무로 듬직하다. 한국전쟁 전까지 물푸레나무 앞에서는 마을 제사가 지내졌다고 한다. 수호신으로 위안을 안겼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고목에 대해 “단순히 오래 산, ‘나무 노인’만은 아니다”며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서려 있다. 이름 없는 백성들의 애달픈 일상사까지 다양한 삶의 사연을 고스란히 품속에 간직하고 있는 우리 문화의 보고다”고 평가했다.

이천=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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