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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거나 찍거나 혹은 쓰고 찍거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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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6호 14면

가와세 하스이의 우키요에 ‘우에노 도쇼구의 눈’ (1929), 24.5x36cm, ‘우키요모쿠한(浮世木板)’ 공방 목판 사본

가와세 하스이의 우키요에 ‘우에노 도쇼구의 눈’ (1929), 24.5x36cm, ‘우키요모쿠한(浮世木板)’ 공방 목판 사본

“…Mais ou sont les neiges d’antan?(…그러나 지난 해에 내린 눈은 어디로 갔나?)”- 프랑수아 비용, 1461년경

유지원의 글자 풍경: ‘찍어내기’의 예술

눈 위에 찍힌 흔적이 있다. 어느 생명의 움직임을 증거하는 흔적이다. 세상에 남겨진 이 지표적 기호에서 우리는 누군가 지나간 자취를 읽는다. 오늘의 햇빛에 어제의 눈이 녹으면 무심한 발자국은 무상하게 사라지고 만다.

쓰기와 찍기

뜻을 오래도록 새기고자 하는 의도를 담아 바위나 나무를 긁은 흔적들이 있었다. 시간과 자연의 풍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마모되며 스러져갔지만, 일부는 세월을 견디며 오늘까지 전해졌다.

‘책’을 뜻하는 영어 book, 독일어 Buch는 ‘너도밤나무(beech)’와 어원이 같고 , 라틴어의 liber, 프랑스어의 livre 역시 글자를 긁어서 새기던 ‘나무의 속껍질’에 어원을 둔다. ‘책’은 말과 생각의 자취가 새겨지는 공간이었다.

글자를 흔적과 자국으로 남기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뉜다. ‘쓰기’와 ‘찍기’다. 글씨·서예·캘리그래피는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지만, 같은 글자의 단어·문장·텍스트를 반복 복제하고 대량생산하는 타이포그래피는 판을 만들어 찍는다. 도장·판화·인쇄는 찍어낸다는 점에서 서로 친척 관계다.

우키요에, 목판화와 육필화

눈이 온다. 소복소복.

창 밖을 보면 창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듯한 각도로 눈이 정말로 내게 ‘온다’. 우유에 물을 탄 듯 보얗게 젖은 하늘을 배경으로 가벼운 눈송이가 떠다니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맑은 날엔 보이지 않던 공기의 흐름, 중력과 공기저항이 눈송이를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새삼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공간’엔 무언가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눈송이는 빙빙 돌기도 했고 때로 아래서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눈송이들이 군무하는 패턴은 계속 달라졌다.

가와세 하스이(川瀬巴水)의 우키요에 ‘우에노 도쇼구의 눈’(1929)은 눈을 표현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에도도쿄박물관의 기념품점에서 이 작품의 잘 복제된 사본을 우연히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가슴이 뛰었다. 바람과 공기와 눈송이의 패턴을 저렇게 포착해서 양식화하는 관찰력과 상상력은 어디서 왔을까? 그 시선이 경이로워서 하염없이 들여다봤다. 독창적이고 아름다웠다. 비를 직선으로 처음 표현하기 시작한 이들도 우키요에 화가들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옵셋인쇄 말고 잘 복제된 전통 다색목판화 기법으로 이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는 내 소망을 알고, 친구가 선물 해주었다. 1957년 사망한 가와세 하스이가 직접 작업한 판본은 아니었고, 후대 장인이 전통식 기법으로 본래의 작업 프로세스에 최대한 충실하게 복제한 작품인 듯 했다. 이런 경우는 옵셋인쇄로는 구현할 수 없는 심층들을 볼 수 있다.

루페(확대경)를 꺼내들고 구석구석 탐색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창작자라서 타인의 창작품을 보면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늘 궁금하다. 미술관에서 유화 작품을 볼 때는 고개를 기울여 옆면에서 본다. 그러면 붓질이 차곡차곡 얹혀진 흔적이 보이고 거기에 담긴 화가의 마음이 보인다. 미술관 전시실에서 작품의 뒷면까지 보기는 불가능하지만, 이 작품은 내 소장품이라 뒷면의 자국 속에 속살대는 제작상의 뒷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우키요에는 크게 ‘육필화’와 ‘목판화’로 구분한다. 육필화와 목판화의 관계는 앞서 언급한 ‘쓰기’와 ‘찍기’의 관계와 얼추 같다. 육필화는 회화적 접근으로, 화가가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그리는 것이라 비싸고 주문제작한다. 목판화는 디자인적이고 공학적 접근으로, 화가의 의도에 따라 여러 직인들이 분업해서 찍어내는 것이라 반드시 부유한 고객이 아니더라도 접근 가능한 가격으로 대량생산한다.

우키요에 ‘우에노 도쇼구의 눈’ 뒷면

우키요에 ‘우에노 도쇼구의 눈’ 뒷면

이 작품의 뒷면을 본 순간 나는 ‘가필’의 흔적들에 놀랐다. 전체적인 큼직한 면분할은 분명 목판으로 찍은 것인데, 울타리·석등·석상의 미세한 선들은 그 위에 손으로 직접 그렸다. 목판화로 접근하되 육필화로 마무리한 것이었다. 목판도 그냥 찍은 것이 아니라 능숙한 훈련을 요구하는 많은 기법들을 사용했다. 젖은 하늘에는 색이 점차 옅어지는 보카시 기법을 썼고, 건물 그림자는 색 위에 다른 색을 겹쳐 찍는 중복 인쇄를 했다. 다색판화의 여러 색판에 쓴 안료들은 색상만 다른 것이 아니라 묘사하려는 대상에 따라 재료의 물성도 달라져 있다. 돌의 회색은 얇고 투명하게 젖어있고, 눈의 흰색은 도탑고 불투명하게 포근히 덮여있다. 무엇보다도 저 폭신폭신한 눈송이들을 모두 손으로 일일이 찍은 것 같다. 작은 동그라미의 형상은 판을 파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찍은 붓자국이다.

찍히는 환경에 반응하는 글자

목판화 기법 속 글자

목판화 기법 속 글자

타이포그래피는 크게 글자를 만들고, 글자를 골라 텍스트를 짜고, 출력을 하는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기초 과정을 시작하는 학생들에게는 컴퓨터 작업이나 수작업을 마친 후 ‘이제 출력·인쇄만 하면 끝!’이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당부한다. 출력과 인쇄, 제작의 공정부터 새로운 종류의 업무가 시작된다.

찍히는 환경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그림의 양식도 글자의 양식도 기술적 환경에 반응한다. 소박한 목판화의 볼록인쇄 환경에서 나오는 글자 형태가 있고, 정교하고 날카로운 동판화의 오목인쇄 환경에서 나오는 글자 형태가 있다.

동판화 기법 속 글자들 이상 필자 소장

동판화 기법 속 글자들 이상 필자 소장

‘그림 4’는 인쇄 역사에서 해상도가 뛰어났던 기술인 동판인쇄로 찍은 그림과 글자들이다. 작은 공간에 무려 네 종류나 되는 글자체들이 섞여있다. 각각의 글자체의 형태와 구조는 크게 다르지만, 이들을 구현하는 도구와 기술적인 환경이 같기에 서로 어울릴 수가 있다. 아주 세밀한 획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이렇게 디지털로 복원되기 전의 글자들이 어떤 아날로그적 환경으로부터 나왔는지 기술 발달사를 알면 서로 다른 문자권, 이를테면 로마자와 한자와 한글도 어울리는 양식으로 골라서 조화롭게 섞어 쓸 수 있다.

이것은 사막에 사는 생물끼리, 춥고 눈 오는 환경에 사는 생물끼리, 종이 달라도 서로 한 데 묶이는 이치와 같다. 글자도 생물과 같아서 쓰이고 찍히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생멸하고 진화한다.

눈이 온다. 소복소복.

눈 위에 찍힌 자국은 햇볕에 덧없이 사라지지만, 판화와 인쇄로 눈을 노래하고 눈을 그려 찍어낸 자국은 널리 퍼져 우리에게 다가와서, 오래 남겨진다. ●

유지원 :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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