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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감염병과 전쟁, 미숙아 연쇄 사망 원인도 밝혔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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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역학조사관은 감염병과 전쟁을 벌이는 '질병 수사관'이다. 지난 10일 충북 청주의 질병관리본부 긴급상황실 앞에서 이혜림(왼쪽)·김인호 역학조사관이 보호복을 입고 있다. 청주=프리랜서 김성태

역학조사관은 감염병과 전쟁을 벌이는 '질병 수사관'이다. 지난 10일 충북 청주의 질병관리본부 긴급상황실 앞에서 이혜림(왼쪽)·김인호 역학조사관이 보호복을 입고 있다. 청주=프리랜서 김성태

은밀·철저하게 질병 수사하는 역학조사관의 세계

이혜림(33) 질병관리본부(이하 질본) 역학조사관은 지난해 2월 경기 여주시 보건소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받았다. A형 간염에 걸린 30세 남성 환자 조사 보고서였다. 보건소에서 "역학조사를 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공원 약수에서 나온 간염 바이러스 찾아내고 #건대 실험실 집단 폐렴도 '환기구 전염' 규명 #역학조사는 현장서 서로 다른 퍼즐 조각 모아 #감염 원인·경로를 하나의 그림으로 맞추는 것 #"감염의 키, 결국 질병 아닌 사람이 쥐고있어" #진실 감추고 거짓말로 엉뚱한 정보 줘 '답답' #평창 올림픽 현장 파견돼 24시간 '모니터링' #"질병 분석만큼 환자 더 살리는 것이 중요"

 하지만 보고서를 살펴보니 '집 근처 공원의 약수를 여과 없이 마셨다'는 한 줄의 내용이 눈에 띄었다. '뭔가 있을 수도 있다.' 이 조사관은 현장으로 달려갔다. 공원 식수를 살펴봤다. 물 마시는 음수대의 위생 상태는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물을 담아와서 균 검사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물에서 A형 간염 바이러스가 나왔다. 보건소에 통보해 음수대를 즉각 폐쇄했다. 하마터면 수인성 집단감염이 발생할 뻔했다. A형 간염은 감기처럼 지나가지만 드물게 갑자기 악화하면서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무서운 감염병이다.

이혜림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관이 보호복 착용 교육을 받는 모습. [사진 이혜림]

이혜림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관이 보호복 착용 교육을 받는 모습. [사진 이혜림]

 2015년 10월 서울 광진구 건국대에선 원인 미상의 폐렴 환자가 발생했다. 첫 환자 발생 이후 추가 감염자가 이어져 55명까지 늘었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문에 나라가 홍역을 치른 터라 호흡기 질환 집단 발생에 깜짝 놀라는 분위기였다. 현장에 출동한 김인호(37) 질본 보건연구사는 건물 도면과 설계도 등을 살폈다. 건물 공기 정화 체계가 층별, 구역별로 나눠진 걸 확인했다. 질본은 공기 순환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보고 건물 전체를 폐쇄했다. 그 후 새로운 환자는 나오지 않았다. 12월 질본은 실험실 사료에 있던 방선균이 환기 시스템을 통해 확산했다고 발표했다.

 두 사람은 역학(疫學)조사관이다. 메르스·C형 간염 등 각종 감염병의 원인과 전파 경로를 추적하는 역할을 한다. 역학조사관은 '질병 수사관'으로 불린다. 지난달 서울 이대목동병원에서 숨진 미숙아 4명이 항생제 내성균 '시트로박터 프룬디'에 감염됐다는 사실도 질병 수사관들이 밝혀냈다. 김 연구사는 "질병으로 난 불을 끄는 소방관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국내에 정식으로 역학조사와 질병 수사관이 생긴 건 2000년대 들어서다. 한동안 감염병 현장 조사는 군 복무 중인 공중보건의사(이하 공보의)나 민간 예방의학 전문가의 몫이었다. 2015년 질병 수사관(34명)의 94%(32명)는 공보의였다. 군 복무를 대신하다 보니 전문성이 쌓이지 않았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보호복을 착용한 환자 주위에 질병관리본부 직원들이 서 있다. [중앙포토]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보호복을 착용한 환자 주위에 질병관리본부 직원들이 서 있다. [중앙포토]

 2015년 186명이 감염돼 38명의 사망자를 낸 메르스가 판을 바꿔놨다. 24시간 상황실이 생기고, 질병 수사관이 대거 확충됐다. 질본의 질병 수사관은 56명으로 늘었다. 공보의는 3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정식 공무원이다. 김인호·이혜림 조사관을 10일 충북 청주의 질병관리본부에서 인터뷰했다.

 가정의학과 전공의인 이혜림 역학조사관은 메르스 사태 후인 2016년 자원해서 질본에 들어왔다. 물ㆍ식품에 따른 감염병을 조사하는 그는 "학교에서 역학조사 수업을 들은 뒤 환자를 진료하는 것도 좋지만 더 많은 국민의 건강을 위해 일하자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2015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에볼라 역학조사를 위해 파견된 김인호 질병관리본부 보건연구사가 감염 의심 주민들의 격리 해제를 알리며 줄을 자르고 있다. [사진 김인호]

2015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에볼라 역학조사를 위해 파견된 김인호 질병관리본부 보건연구사가 감염 의심 주민들의 격리 해제를 알리며 줄을 자르고 있다. [사진 김인호]

 4년 먼저 입사한 김인호 보건연구사는 위험지역 전문 역학조사관이다. 2015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에볼라 현장에 급파됐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요원 자격이었다. 창궐하던 시기를 지나긴 했지만 치사율이 30~40%에 달하는 무서운 감염병이라 누구도 선뜻 손을 들지 않았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에볼라를 경험하겠느냐.' 역학조사관으로서의 호기심·모험심이 발동했다. 친척들이 "제정신이냐"고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볼라 환자 의심 신고가 들어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증세를 확인했다. 어떤 경우에는 환자와 접촉자를 격리했다. 많을 때는 하루에 6~7건 정도 처리했다. 그렇게 6주를 보냈다.

그해 메르스, 건대 집단 폐렴 사건에 투입됐다. AI(조류인플루엔자) 방역 작업에도 참여했다. 김 연구사는 "현장에 나가는 게 좋아서 역학조사관이 됐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혜림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관이 A형 간염 바이러스가 나온 공원 음수 시설을 조사하고 있다. [사진 이혜림]

이혜림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관이 A형 간염 바이러스가 나온 공원 음수 시설을 조사하고 있다. [사진 이혜림]

 역학조사는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 김 연구사는 "퍼즐 조각을 맞춰서 하나의 그림을 만든다"고 말한다. 이 조사관은 "감염의 키는 질병 그 자체보다 사람이 쥐고 있을 때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현장 인터뷰가 가장 중요하다.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은 뭔가.
“뻔히 드러나는데도 인터뷰 과정서 잘못을 감추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기억을 정말 못 할 때도 있지만, 일부러 엉뚱한 정보를 주기도 한다. 말하는 걸 최대한 듣되 다른 데이터를 통해서 진실을 가려야 한다.”(김인호)
“종종 산후조리원 등에 로타바이러스 조사를 나가는데 신생아들은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를 못 하니까 어렵다.”(이혜림)

 새로운 질병이 또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역학조사관은 항상 '스탠바이(출동대기)'다. 감염 확인용 키트와 서류 등은 항상 준비해둔다. 이 조사관은 "TV에 무슨 사건이 나오면 부모님이 ‘저기 또 가야겠네’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미숙아 4명이 숨진 뒤 폐쇄된 이대목동병원 신생아중환자실. 질병관리본부는 역학조사를 통해 숨진 아기들이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된 사실을 확인했다. [중앙포토]

지난해 12월 미숙아 4명이 숨진 뒤 폐쇄된 이대목동병원 신생아중환자실. 질병관리본부는 역학조사를 통해 숨진 아기들이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된 사실을 확인했다. [중앙포토]

 질병 수사관의 전공은 다양하다. 역학조사와 직접 연결되는 예방의학 전문의는 두 명뿐이고 나머지는 가정의학 전문의, 간호사, 보건학 전공자 등이다.

 김 연구사는 수의대, 이 조사관은 사범대와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 김 연구사는 미국 유학파다. 거기서 역학을 배웠다. 이 조사관은 "다양한 경험을 하고 몇 가지 학문을 공부한 게 시야를 넓혀줬다"고 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평창 올림픽 현장으로 파견될 예정이다. 전 세계에서 온 선수들의 감염병 정보를 24시간 확인하고 감시한다. 김 연구사는 "질병을 멋지게 분석하기보다는 감염병에 걸린 환자를 한명이라도 더 살려야겠다는 초심을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아웃브레이크' '세계의 끝' 등 영화·드라마선 괴질 퇴치 영웅

감염병의 원인과 전파 경로를 밝히는 '질병 수사관'은 영화ㆍ드라마의 단골 출연자다. 때로는 보건 당국의 역학조사관이, 때로는 민간 전문가가 나서 괴질을 파고든다.

 헐리우드 영화 '컨테이젼'(2011)은 세계로 퍼지는 정체불명의 감염병을 다룬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세계보건기구(WHO)가 직접 감염 경로 조사에 나선다. 미국 드라마 '메디컬 인베스티게이션'(2004)에는 희귀 질병을 확인하는 미국 국립보건원(NIH) 역학조사팀이 주인공이다. 국내에선 JTBC 드라마 ‘세계의 끝’(2013)에 질병관리본부의 질병 수사관들이 대거 등장한다.

 헐리우드 영화 '아웃브레이크'(1995)는 전문가가 고군분투한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신종 감염병이 세계로 퍼지자 미국의 역학자가 질병 경로를 밝힌 뒤 환자를 격리하고 방역 조치를 한다. 다만 인기리에 방영된 미국 범죄드라마 'CSI'는 질병 수사관의 영역이 아니다. 경찰 과학수사대가 범죄 원인을 수사하는 것으로 의학적 조사와는 엄연히 다르다.

 영화·드라마는 현실과 차이 난다. 이혜림 역학조사관은 "드라마·영화에 나오는 극적인 사례보다는 상시적인 업무가 대부분이다. 개인이 아니라 팀 단위로 유기적인 협력이 이뤄져야 조사를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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