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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니안·로타 다녀온 뒤 사이판의 기억이 흐릿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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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령 북마리아나제도는 15개 섬으로 이뤄졌다. 이중 사람 사는 섬은 사이판·티니안·로타 3개 뿐이다. 익히 알려진 사이판 말고 두 섬이 궁금했다. 하여 2017년 10월, 사이판 간 김에 두 섬을 다녀왔다. 가볍게 둘러볼 작정이었는데 단단히 마음을 뺏겼다. 호화로운 리조트도 없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음식을 맛본 것도 아니었다. 대신 혼자서 전세 낸 것처럼 한적한 해변, 만화에서나 본 듯한 새들 지저귀는 소리, 수줍은 미소를 간직한 사람을 가는 곳마다 마주쳤다. 관광 인프라가 낙후해 불편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그 점이 좋았다.

북마리아나제도 로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수욕장인 테테토비치. 가장 인기 있다 해도 이웃섬인 사이판이나 괌 해수욕장처럼 북적이지 않는다. 20m만 바다로 걸어가도 산호밭이 펼쳐져 있다.

북마리아나제도 로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수욕장인 테테토비치. 가장 인기 있다 해도 이웃섬인 사이판이나 괌 해수욕장처럼 북적이지 않는다. 20m만 바다로 걸어가도 산호밭이 펼쳐져 있다.

별모래 반짝이는 해변

사이판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국내선 터미널로 갔다. 티니안 가는 6인승 경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수하물 뿐 아니라 승객의 몸무게를 일일이 재서 비행기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자리를 배정했다. 한국의 시골 버스터미널보다 작은 공항 대합실에서 비행기를 기다렸다. TV에 나온 풋볼 경기가 아니었다면 도무지 미국이라고 느낄 순 없었다.

사이판에서 티니안과 로타를 갈 때 탔던 경비행기. 창밖으로 태평양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사이판에서 티니안과 로타를 갈 때 탔던 경비행기. 창밖으로 태평양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비행기가 뜨자마자 내렸다. 15분 만에 도착한 티니안공항에서 여행사 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한갓진 해변에서 현지인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바비큐를 굽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앞 해변으로 나갔다. 티니안에서 낙조가 가장 아름답다는 타가비치. 하늘빛이 분홍에서 보라로 옮겨가고 한편에선 아이들 꺄르륵대는 소리가 음표처럼 하늘에 걸렸다.
이튿날 아침,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타가 비치 옆 타촉냐 비치에서 스쿠버다이빙 채비를 했다. 티니안에는 다이빙 명소가 많았지만 가볍게 체험 다이빙만 하기로 했다. 밀가루처럼 새하얀 해변가엔 강사와 기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벅저벅 걷다가 밧줄을 붙잡고 잠수를 시작했다. 수심 10m 쯤 이르니 산호 군락이 듬성듬성 보였다. 김장용 무만큼 큼직한 해삼이 바닥에 널렸고, 나비고기·벵에돔·흰동가리 등 형형색색 열대어가 노닐었다.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 바다만큼 물고기가 많지 않았지만 시야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섬으로 넘어올 때 비행기 차창에 비쳤던 쪽빛바다가 바다밑에도 숨어 있었다.

티니안 타촉냐비치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는데 온갖 열대어가 모여들었다. 먹이라도 주는 줄 알았나보다.

티니안 타촉냐비치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는데 온갖 열대어가 모여들었다. 먹이라도 주는 줄 알았나보다.

다이빙을 마치고 티니안에서 가장 큰 식당인 JC카페로 갔다. 식당 간판이 영어·일본어·한국어로 쓰여 있었다. 메뉴는 다채로웠다. 중국식 잡탕과 미국식 닭튀김,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 답게 이 작은 섬의 식당 메뉴에도 온갖 문화가 뒤섞여 있었다. 식당이 있는 동네 이름은 산호세. 17~19세기 티니안과 마리아나제도를 점령한 스페인의 흔적이다. 스페인 이후 섬의 주인은 미국, 일본, 다시 미국 순으로 바뀌었다. 스페인이 이 땅을 밟기 전까지는 차모로족이 살았다.

티니안 주도로인 브로드웨이. 섬 모양이 뉴욕 맨해튼을 닮았다 해서 길 이름도 뉴욕에서 따왔다.

티니안 주도로인 브로드웨이. 섬 모양이 뉴욕 맨해튼을 닮았다 해서 길 이름도 뉴욕에서 따왔다.

여행사 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제주도 면적의 5% 밖에 되지 않아서 반나절 만에 하이라이트를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길 이름이었다. 브로드웨이·월스트리트·8번가. 알고 보니, 섬 모양이 뉴욕 맨해튼과 비슷하다며 2차 세계대전 때 주둔한 미군이 붙인 이름이란다. 물론 길가에 공연장이나 100층이 넘는 빌딩은 없다. 우거진 야자수와 드넓은 목장 뿐.

섬 북쪽 출루비치에는 별 모양 모래가 많다. 산호가 오랜 세월 파도에 갈고 깎여 별 모양이 됐다.

섬 북쪽 출루비치에는 별 모양 모래가 많다. 산호가 오랜 세월 파도에 갈고 깎여 별 모양이 됐다.

섬을 둘러싼 해변은 가는 곳마다 색달랐다. 북서쪽 출루비치에는 별처럼 생긴 작은 모래알갱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죽은 산호가 오랜 세월 파도에 갈리고 깎여 별이 됐대요.” 장문수 굿투어 소장의 설명은 짤막했지만 모래알갱이를 들여다볼수록 신비로웠다. 섬 북동쪽에는 바닷물이 10m 높이로 치솟는 천연분수 ‘블로 홀’이 있다. 용암이 굳은 갯바위에 지름 50㎝ 정도의 구멍이 있는데 파도가 칠 때마다 이 구멍으로 물이 치솟는 거다. 20~30m 떨어져 사진을 찍었는데도 물보라가 날려왔다.

작은 구멍에서 분수처럼 물이 솟구치는 블로 홀. 고래가 등으로 물을 뿜는 것 같다.

작은 구멍에서 분수처럼 물이 솟구치는 블로 홀. 고래가 등으로 물을 뿜는 것 같다.

일본과 관련된 유적도 많았다. 섬 남쪽에 자살절벽이 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일본군과 민간인 수천 명이 이 절벽에서 최후를 맞았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자 택한 결정이었다. 절벽 뒤편 산자락에는 당시 미군이 쏜 포탄 자국이 지금도 또렷하다. 자살로 내몰린 민간인 중 상당수는 강제징용 당한 한국인이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 5000명 이상이 티니안에서 사탕수수 농장과 건설 현장에서 혹독한 노역을 하다가 전쟁통에 목숨을 잃었다. 산호세 마을에 ‘평화소원한국인위령비’가 세워진 건 그래서다.
섬을 점령한 미군은 45년 8월, 태평양전쟁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데 이 또한 티니안에서 이뤄진 역사다. 섬 북쪽 공군기지에서 B-29기에 실은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투하했고, 사흘 뒤에는 두 번째 폭탄 ‘팻 맨’을 실어 나가사키(長崎)에 투하했다. 지금은 풀이 무성하게 자란 비극의 현장에서 세월의 무상함만 느껴졌다.

1944년까지 일본이 쓰던 군 기지.

1944년 자살한 일본군을 기리는 추모비.
산호세 마을에 있는 한국인 위령비.
1945년 미군이 원자폭탄을 실은 공군기지.

열대 새들의 낙원

북마리아나제도 로타에 있는 스위밍홀. 바닷가 천연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현지인의 모습.

북마리아나제도 로타에 있는 스위밍홀. 바닷가 천연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현지인의 모습.

티니안에서 로타로 곧장 가는 비행편은 없었다. 사이판에서 8인승 비행기를 탔다. 마리아나제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로타는 티니안보다 멀었다. 30분 걸려 도착하자마자 ‘세계에서 가장 친근한 공항(World's frienliest airport)’이란 환영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튿날 섬을 떠나며 이 말이 틀리지 않다 생각했다. 인구 2500명 뿐인 섬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더할 나위없이 친절해서였다. 필리핀·인도·일본 그리고 로타. 태어난 곳이 어디든 수줍은 듯 맑은 웃음이 모두 닮았었다.
로타에서는 렌터카를 이용했다. 미리 예약해둔 차를 받아 숙소로 향했다. 짐을 풀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스위밍 홀. 이름 그대로 바닷가 천연 수영장인데 들어가는 길부터 인상적이었다. 야자수 우거진 정글 숲 비포장도로를 1㎞ 정도 달리는데 형형색색 새들은 물론 야생 닭까지 푸다닥 날아다녔다. 현지인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가 천연수영장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사이판에 사는 스물두살 청년 마이클은 누나와 함께 로타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로타처럼 고요하게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은 드물죠. 사이판은 어디를 가든 외국인 관광객이 북적거리니까요.”

네이비스 지역에는 고대 차모로인이 채석장으로 쓰던 흔적이 남아 있다.

네이비스 지역에는 고대 차모로인이 채석장으로 쓰던 흔적이 남아 있다.

로타에서는 공항에서 챙긴 지도 한 장이 든든한 가이드 역할을 했다. 차를 몰고 섬 남동쪽으로 이동했다. 관광지 대부분이 해변에 있는데 내륙 네이비스 지역에 꼭 들러보라는 내용을 보고서였다. 고대 차모로족이 채석장으로 쓰던 공간인데 최대 35t에 달하는 현무암 돌덩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고대 주택을 떠받치던 주춧돌인데 여기서 다듬은 돌을 나무배에 실어 다른 섬으로 옮겼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새 보호구역 전망대에서는 트레일을 걸으며 온갖 새가 비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새 보호구역 전망대에서는 트레일을 걸으며 온갖 새가 비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채석장 남쪽 바닷가는 새 보호구역이다. 깎아지른 벼랑 아래 숲에 온갖 새가 살고 있다. 전망대 트레일을 걸으며 새들의 낙원을 엿봤다. 한국에서도 익히 봤던 까마귀나 왜가리도 많았지만 난생 처음보는 새가 이방인을 경계하며 바쁘게 날아다녔다. 검은바람까마귀와 괌동박새처럼 로타가 아니면 보기 힘든 새들을 알아보진 못했다. 그러나 흰꼬리열대새가 쪽빛바다 위를 우아하고 날렵하게 나는 모습을 한참 넋놓고 바라봤다.

갈매기가 아니다. 흰꼬리열대새다. 쪽빛바다를 배경으로 나는 모습이 우아하다.

갈매기가 아니다. 흰꼬리열대새다. 쪽빛바다를 배경으로 나는 모습이 우아하다.

다시 차를 몰고 찾아간 곳은 섬 북쪽의 테테토비치. 로타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이라는데 역시 아무도 없었다. 물안경을 쓰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20~30m 쯤 들어갔을까. 허리춤에서 물이 찰랑이는 깊이 였는데 거대한 산호밭이 깔려 있었다. 특히 사슴뿔산호가 많았는데 자잘한 돔과 물고기가 산호 틈틈이 숨어 있었다. 전 세계 유명하다는 휴양지 해변에 이렇게 백사장 바로 앞에 산호밭이 온전히 남은 곳이 있을까 싶었다.

북마리아나제도 닮은 듯 다른 두 섬 #2차대전 일본군 유적 많은 티니안 #고대 차모로족 전설 품은 로타 #한갓진 해변·깨끗한 바닷속은 닮아

테테토비치에서는 20~30m만 걸어가도 산호와 열대어를 볼 수 있다.

테테토비치에서는 20~30m만 걸어가도 산호와 열대어를 볼 수 있다.

로타에서 가장 인기있는 해변 테테토비치. 해질 무렵 한갓진 해변에서 현지인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로타에서 가장 인기있는 해변 테테토비치. 해질 무렵 한갓진 해변에서 현지인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일몰시간에 맞춰 인근 언덕 송송전망대로 올라갔다. 이름이 귀여운 전망대에서는 송송마을과 마을 뒤편에 솟은 웨딩케이크 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송송은 차모로어로 마을을 뜻한다. 웨딩케이크산은 결혼식 때 쓰는 2단 케이크처럼 생겼다. 유치하지만 간명한 이름들. 로타에서 마주친 풍경과 사람들처럼 이 섬의 인상이 그랬다. 수줍고 귀엽고 친근하고.

송송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송송마을. 멀리 보이는 낮은 산이 웨딩케이크산이다.

송송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송송마을. 멀리 보이는 낮은 산이 웨딩케이크산이다.

◇여행정보=티니안·로타를 가려면 우선 사이판까지 가야 한다. 아시아나항공 등 5개 항공사가 취항 중인데 낮에 도착하는 제주항공을 타면 티니안·로타로 바로 넘어가기 좋다. 스타마리아나에어가 사이판~티니안(편도 55달러) 하루 12편, 사이판~로타(편도 110달러) 하루 3편 운항한다. starmarianasair.com. 티니안에서는 한국 여행사인 굿투어(goodtinian.com)를 통하면 섬 일주 투어, 스노클링·다이빙 등을 즐길 수 있다. 숙소는 타촉냐해변 바로 앞 오션뷰호텔(tinianhotel.modoo.at)을 추천한다. 로타에서는 아일랜더렌터카(islanderrentacar.com)를 이용했다. 소형차 하루 60달러. 로타리조트&골프클럽(rotaresortgolf.com)은 골프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공항과 스위밍홀이 가깝다. 마리아나관광청 홈페이지(mymarianas.co.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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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니안·로타(미국)=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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