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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걸이 되다! 아웃도어 왕초보의 빙벽 초등기(初登記)

중앙일보

입력

우리나라는 빙벽 등반을 즐기기에 최고의 시설과 환경을 갖췄다. 코오롱등산학교 실내 빙벽장에서 원종민 강사가 20m 빙벽을 오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빙벽 등반을 즐기기에 최고의 시설과 환경을 갖췄다. 코오롱등산학교 실내 빙벽장에서 원종민 강사가 20m 빙벽을 오르고 있다.

다이어트나 영어 공부 등 어차피 안 될 거(?) 말고, 올해는 작은 목표를 이뤄가기로 다짐했다. 새해 첫 도전 과제로 삼은 것이 ‘빙벽등반’이다. 우리나라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실내 빙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그 빙벽을 누구나 오를 수 있다는 데 마음이 끌렸다. 스파이더걸(spider girl)이 되겠다는 작은 소망으로 지난 1월 8일 코오롱등산학교에서 생애 첫 빙벽등반에 나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빙벽등반은 의외로 문턱이 낮았고, 빙벽을 기어오르는 경험은 짜릿했다. 비록 이틀간 몸져눕긴 했어도 도전을 이뤄냈다는 성취감을 누렸다.

코오롱등산학교, 세계 최고 빙벽장 갖춰 #무경험자도 강습 받으면 당일 등반 가능 #5m 빙벽 훌쩍 올랐지만 20m는 요원해

빙벽등반은 특권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뤄진 산지 국가다. 그리고 해마다 건너뛰는 법 없이 혹한의 겨울이 찾아든다. 이 두 가지 조건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져야만 즐길 수 있는 게 ‘아이스클라이밍’ 즉 빙벽등반이다. 자연에서 빙벽등반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에 살면서도 빙벽등반에 관심이 없다면 ‘특권’을 포기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단순한 생각으로 생애 첫 빙벽등반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서울 우이동 코오롱등산학교. 1985년 개교했다. 기네스 인증(오른쪽) 을 받은 세계 최고(20m) 실내 빙벽장을 갖추고 있다.

서울 우이동 코오롱등산학교. 1985년 개교했다. 기네스 인증(오른쪽) 을 받은 세계 최고(20m) 실내 빙벽장을 갖추고 있다.

왕초보가 자연 빙벽부터 오를 수는 없었다. 실내 빙벽장에서 기본기를 익히는 게 먼저였다. 빙벽등반에 입문한다는 이들이 한 번쯤 거쳐 간다는 빙벽등반 사관학교 코오롱등산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서울 우이동에 있는 코오롱등산학교는 건물 지하 3층에 최고 높이 20m에 달하는 실내 빙벽장을 두고 있다. 2005년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실내 빙벽으로 기네스 인증을 획득했다. 이곳에서 겨우내 한 차례 ‘빙벽반’ 합숙훈련을 진행하는데, 첫째 주 2박3일 간 실내 빙벽장에서 기초를 닦고, 둘째 주에는 실외 인공 빙벽장에서 5박6일 실전 경험을 쌓는다. 코오롱등산학교 원종민 강사에게 빙벽반 실내 훈련을 맛보기 체험하라는 허락을 얻었다.

빙벽등반의 기초 장비를 모두 착용한 모습이다. 손에는 아이스바일을 들고, 발에는 크렘폰을 장착한 빙벽화를 신어야 한다. 로프를 맬 수 있는 벨트도 필수이고, 얼음 조각에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헬멧도 써야 한다.

빙벽등반의 기초 장비를 모두 착용한 모습이다. 손에는 아이스바일을 들고, 발에는 크렘폰을 장착한 빙벽화를 신어야 한다. 로프를 맬 수 있는 벨트도 필수이고, 얼음 조각에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헬멧도 써야 한다.

지난 8일 오전 9시 코오롱등산학교 지하 3층에 다다르니 21명의 학생이 실내 빙벽장의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기초부터 배우면 누구나 오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코오롱등산학교 윤재학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마음이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진정 왕초보는 나 하나뿐인 것 같아 주눅이 들었다. 먼저 장비를 갖췄다. 헬멧을 쓰고, 장갑을 끼고, 빙벽화를 신고, 빙벽에 발을 단단히 고정할 수 있도록 철 이빨이 솟아있는 크렘폰(아이젠)을 빙벽화에 덧신었다. 그리고 수직의 얼음 절벽에서 나의 손이 돼 줄 아이스바일, 즉 얼음도끼를 양손에 들었다. 호기롭게 도끼를 빙벽에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칭찬은 고래도 오르게 한다

영하 20도를 가리키는 실내 빙벽장 온도계.

영하 20도를 가리키는 실내 빙벽장 온도계.

원 강사를 따라 졸래졸래 실내 빙벽장으로 들어섰다. 두꺼운 쇠문을 열어젖히니 면적 200㎡(약 60평) 규모의 얼음 세상이 드러났다. 폭포수가 흘러내려 그대로 얼어버린 듯한 빙벽 앞에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긴장한 나머지 빙벽장이 영하 20도로 유지되는데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출입구 맞은편에 너비 13m, 높이 20m의 세계 최고 빙벽이 서 있었고, 나머지 3개 면의 빙벽은 5m 높이였다. 아파트 한층 높이가 보통 2.3m라는데, 건물 2층 높이를 넘어서는 5m 빙벽, 건물 9층 높이의 20m 빙벽에 내가 과연 매달릴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수직 빙벽 앞에서 단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할 것이란 슬픈 예감이 들었다.
“자자 긴장하지 말고. 빙벽은 팔심으로 오르는 게 아니에요. 하체 힘을 써야 해요.”
원 강사는 당장 탈출하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훈련을 개시했다. 새 부리처럼 생긴 아이스바일을 빙벽 틈에 걸고 나서, 크램폰에 불쑥 삐져나온 철 이빨을 빙벽에 꽂아 발이 지탱할 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초보는 얼음에 매달리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금방 지치고 말아요. 얼음에 단단히 고정한 양발에 내 몸무게를 분산시키고, 굽혔던 무릎을 쭉 피면서 위로 올라가야 해요.”

초보자는 팔과 다리가 수평을 이루는 X자 자세(X바디)를 연습한다. 숙련자는 빙벽을 걷듯이 오르는 N자 자세(N바디)로 빙벽을 오른다.

초보자는 팔과 다리가 수평을 이루는 X자 자세(X바디)를 연습한다. 숙련자는 빙벽을 걷듯이 오르는 N자 자세(N바디)로 빙벽을 오른다.

5m 빙벽을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시범을 보이더니, 원 강사는 당장 출발하라고 부추겼다. 바들바들 떨면서 빙벽의 옴폭한 틈 사이에 아이스바일을 턱턱 올렸다. 그러고선 지상 30㎠ 위 빙벽에 두 발을 꽂아 넣었다. “더 높이, 더 높이” 강사의 구령 소리에 아이스바일을 다시 휘둘렀다. 움푹한 얼음에 발을 찌른 뒤 재차 아이스바일을 정수리 위로 올렸다. 오직 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빙벽에 매달렸더니, 어느새 나는 5m 빙벽을 기어오르는 빙벽인(?)이 돼 있었다. “완료!” 강사의 외침에 5m 빙벽 꼭대기에서 로프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우와 대단한데! 수많은 학생을 지도했지만 단번에 5m를 올라간 여학생은 극히 드물어요.”
호랑이 선생님에게 생각지도 않던 칭찬을 들었다. 얼떨떨했지만 날아갈 듯 기뻤다. 격려에 힘입어 20m 빙벽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의 근육은 일회용이었다

20m 빙벽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차, 원 강사는 몸을 녹이라고 지시했다. 빙벽을 오르는 감을 잊기 전에 얼른 도전하고 싶었지만, 스승님의 말씀을 따랐다. 거대한 냉동창고인 빙벽장을 빠져나와 의자에 걸터앉으니, 쉬어야만 했던 이유를 뼈저리게 느꼈다. 당장 근육이 아우성을 치면서 통증이 밀려왔다.
“온종일 앉아서 모니터만 보고 키보드만 치니 팔을 들어 올릴 일이 있겠어요?”
로프를 조절해주던 염동우 강사는 옆구리와 목덜미가 꽤 놀랐을 것이라 진단했다. 빙벽등반 초보가 흔히 겪는 근육통이란다. 하체 힘이 아니라 팔심을 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일단 30분간 어깨와 팔 등을 주무르며 빙벽등반 자세를 머릿속으로 연습했다.
다시 빙벽장으로 들어가 2차 도전에 나섰다. 얼른 20m 빙벽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다는 욕심도 났다. 출발은 괜찮았다. 이미지 트레이닝한 그대로 아이스바일을 잡아 얼음에 내 무게를 싣고, 가벼워진 발을 움직여 적당한 자리에 꽂아 넣었다. 발바닥이 얼음을 밀어 올리는 힘으로 하체를 펴고 다시 빙벽에 바싹 달라붙어 아이스바일을 꽂아 넣을 홈을 찾았다.

바들바들 5m 높이까지 빙벽을 오르다가

바들바들 5m 높이까지 빙벽을 오르다가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려 버리고 말았다.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려 버리고 말았다.

5m까지 순조롭게 올라갔지만, 복병이 나타났다. 20m 빙벽은 중간께 톡 튀어나온 모양새였는데, 5m 빙벽의 각도가 90도라면 20m 빙벽은 수직에서 5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졌다. 90도와 95도는 천지 차이여서 95도 코스로 진입하자마자 온몸이 뒤로 쏠려버렸다. 한순간 힘이 풀리더니 아이스바일을 빙벽에 찍은 채 발이 미끄러졌다. “으악” 비명과 함께 착 달라붙었던 몸이 빙벽에서 떨어졌고, 결국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를 악물고 덤볐지만, 5m 빙벽을 초등하면서 근육의 힘을 모조리 소진한 것 같았다.

토왕성폭포를 꿈꾼다

강원도 원주 판대 아이스파크 인공 빙벽을 오르며 겨울을 만끽하고 있는 클라이머들. [중앙포토]

강원도 원주 판대 아이스파크 인공 빙벽을 오르며 겨울을 만끽하고 있는 클라이머들. [중앙포토]

빙벽장은 ‘탁탁’ 아이스바일을 빙벽에 걸치는 소리, ‘팍팍’ 크램폰을 빙벽에 꽂는 소리만 가득했다. 빙벽등반을 배우러 찾아온 학생 21명과 그들을 지도하는 강사 6명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수업에 임했다. 학생은 연령대가 다양했는데 최고령은 59세, 최연소는 31세였고 암벽등반을 배우려는 이유도 제각각이었다. 군대에서 특전사를 훈련하는 교관과 소방안전본부 소속 119산악구조대원처럼 필요로 빙벽등반 기술을 익히는 이들도 있지만 겨울레포츠로 빙벽등반에 도전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빙반등벽이 이렇게 인기 있는 줄 알지 못했다. 윤재학 교장선생님은 “우리나라 빙벽등반 마니아가 적어도 1000~2000명에 이르고, 아이스클라이밍(빙벽등반) 종목의 남녀 세계랭킹 1위를 모두 한국 선수(박희용·송한나래)가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달 전기세만 300만~400만원이 드는 코오롱등산학교 실내 빙벽장이 운영될 수 있는 이유도, 찾아드는 아이스클라이머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8번 빙벽등반에 나섰지만, 결국 20m 빙벽의 정상을 오르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팔과 다리에 힘이 풀려 오르면 오를수록 자세도 흐트러지고, 등반 높이도 낮아졌다. 그래도 나 나름의 성취는 얻었다. 빙벽에 대한 공포심은 사그라지고, 어느새 빙벽등만은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언젠가는 세계 최고의 자연 빙벽으로 평가받는 설악산 토왕성폭포에 도전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겨우내 꽝꽝 얼어붙은 폭포를 지나친다면, 어느새 얼음 도끼질을 하는 나를 상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행정보=코오롱등산학교(02-3677-8519)는 실내 빙벽장을 사계절 운영한다. 운영 시간 월~금요일 오후 2시~11시. 토·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체험강습 프로그램(3시간)을 들으면 초보자나 무경험자도 빙벽등반을 체험할 수 있다. 1시간 강습과 장비 대여료가 포함됐다. 1인 8만원. 1월 12일부터 17일까지는 실외 인공 빙벽장인 강원도 원주 판대 아이스파크에서 빙벽등반 5박6일 합숙 훈련을 진행한다. 수강료 36만원. 아이스바일·빙벽화·크램폰 등 장비도 빌려준다. 대여료 5만원. 한국등산학교(02-3677-8519), 서울등산학교(02-749-0480) 등은 기초 훈련을 이수한 사람을 대상으로 실외 빙벽등반 강습을 진행한다.

글·사진=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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