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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기획] '작은 정부, 큰 시장' 대세인가 직무유기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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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병천 교수

<강원대·경제무역학부>

참여 정부라는 문패를 달고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지 3년이다. 남은 2년은 양극화를 극복하고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성사시키는 데 집중하겠다고 한다. 양극화를 극복한다면서, 이 양극화를 유례없이 심화시킬 한.미 FTA를 돌격적으로 추진하겠다 하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사실 참여정부의 지난 3년은 한 정권의 3년으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1987년 6월 항쟁 이래 20년, 즉 개발독재 종식 이후 한국 민주주의 실험의 실적과 공과를 저울에 올려놓고 있다.

문제는 참여정부 3년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민주주의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한 회의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참여 없는 참여 정부의 실정(失政)은 곧 전환기 한국 민주화 체제의 균열과 위기를 낳고 이를 기회로 보수 담론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고 있다. 보수 담론은 근현대사 해석에서부터 미래 전망까지 총체적 재구축을 도모하고 있다. 이에 비해 진보 담론은 다소 뒤쳐진 것으로 보인다.

주목해야 할 점은 진보진영 내부에서 큰 분화가 진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자본주의 대(對) 사회주의라는 인식틀은 약화됐다. 오래 전에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의 다양성론이 대두됐으며 스웨덴.네덜란드.덴마크를 모델로 하는 사회민주적 자본주의론도 등장하고 있다. 과연 오늘의 한국경제 문제를 어떻게 보고, 대안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학계 담론은 크게 세계화 속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관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가져 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라진다.

그럼으로써 효율성.사회정의 그리고 국민경제의 발전을 어떻게 도모할까에 대한 처방도 다르다. 이 차이가 참여정부 초기 지루할 정도로 전개됐던 성장 대 분배 논쟁, 그리고 두 개의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대안연대 사이에 벌어진 재벌개혁 논쟁, 사회 양극화 논쟁으로 나타났다. 나아가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성격을 둘러싼 견해 차이,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경제 성격에 대한 규정과 미래 대안에 대한 전망 차이로 드러나기도 한다.

냉전시대 이래 보수 담론이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은 반공,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이었지만 오늘의 신보수주의 핵심 담론은 작은 정부와 큰 시장론, 즉 하이예크식의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와 탈(脫)민족적 글로벌리즘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 그런 보수담론은 민경국의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위즈비즈, 2003), 좌승희의 '명령으로 안되는 경제'(나남출판, 1999) 등이 대표적인 논저다.

이들은 자유 시장과 사유 재산의 보장을 주장한다. 그래서 규제 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감세를 통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 자유로운 경쟁, 국민경제론이 실종된 무차별한 개방, 적자 생존이 곧 정의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시장은 마치 세속종교이자 물신숭배의 대상인 셈이다. 가난은 자기가 못나고 게을러서, 부자는 자기가 잘 났고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눈에는 양극화를 몰고 가는 자본 권력의 횡포는 물론 재벌체제의 문제점도 보이지 않는다. 국민경제의 불안정과 소용돌이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물론 공정 경쟁의 기본 규칙조차 거추장스럽게 생각한다.

다음 중도파 담론으로 개혁적 자유주의를 들 수 있다. 97년 IMF 체제 형성, 이후 한국경제의 인식과 전망에서 주도 담론의 위치에 있는 것이 이들이다. 이진순의 '한국경제 위기와 개혁'(21세기북스, 2003), 강철규의 '투명경영, 공정 경쟁'(따뜻한 손, 2003) 등이 대표적이다. 97년 이후 한국사회 구성의 전환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나, 핵심에는 이제 시민사회가 형성됐다는 것, 사회전반에 걸쳐 절차적 합리성.책임성.투명성이 제고됐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담론이 개혁적 자유주의다. 이들은 자유방임적 시장에는 반대한다. 시장에는 공정 경쟁의 규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의 실패를 어느 정도로 인정을 하며, 따라서 작은 정부를 넘어선 정부 역할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양극화를 통한 성장이 아니라 양극화가 치유돼야할 대상이라는 생각도 엿보인다. 사회 협약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한다. 그래서 재벌개혁이나 복지정책 등에서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와 충돌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미국식 자유시장과 주주 자본주의의 한국화, 즉 '리틀 아메리카'를 추구한다. 문제는 한국판 개혁적 자유주의의 비극이다. 유럽형이나 영미형 복지 수준에 미달하는 상황에서 미국 이상으로 노동 시장의 급진적 시장화와 비정규직화를 비롯한 양극화를 밀고 나간 것이다. 그것이 자초한 생존권의 위기가 곧 오늘의 개혁적 자유주의가 맞은 위기의 핵심이다.

마지막으로 진보 담론은 어떤가. 이들은 보수 담론이 말하는 바 큰 시장이란 곧 큰 자본 권력이자, 그 자본 권력이 행사하는 지배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자본 권력의 지배는 자유와 정의가 아니라, 폭력.부자유.불평등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 파괴를 낳는다고 본다. 최장집의 '위기의 노동'(후마니타스, 2005), 전창환의 '위기 이후 한국 자본주의'(풀빛, 2004)등이 대표적인 논저다.

이들은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 마련을 우선으로 본다. 또 노동하기 좋은 나라만이 아니라 국민 대중들이 책임에 상응하는 권리와 발언권을 가지면서 살기 좋은 나라, 사회경제적 시민권과 보편적 복지권이 보장되는 나라를 원한다. 국민 경제 각 부문의 균형 발전이 이루어지는 나라, 더 많은 성장이 아니라 질적 성장과 생태계의 공생이 이루어지는 나라, 세계화 속의 약육 강식이 아닌 공생의 연대를 추구하는 나라가 중요한 것이다.

이들이 97년 IMF 체제에서 주목하는 것은 절차적 합리화와 정상화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유화'(liberalization against democracy)다. 국제 금융 자본과 대재벌의 지배 동맹 아래 급진적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민중 생존권은 위기에 몰렸고, 민주주의와 국민경제는 공동화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의 양극화 현상에는 이 구조적 모순이 응축돼 있다고 본다. 따라서 지금은 고통분담과 사회적 타협이 아니라 '희생의 교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한다.

진보 담론에서 곤란한 점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세계화 속의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 경쟁 상황에서, 한국의 현실적 조건에 뿌리 내릴 수 있고 국민 대중에 설득력있게 다가갈 수 있는 대안이 굳건하지 못하는 점이다. 대안을 실현할 주체적 조건도 미비돼 있다. 그러면서 내부 분화와 분열도 심하다. 세계화와 양극화의 시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둘러싼 보수.중도.진보 담론은 우리의 삶을 판이하게 바꾸어 놓을 한.미 FTA 소용돌이 판에서 새로운 경쟁을 시작하고 있다

이병천 교수 <강원대·경제무역학부>

핏기 없는 신자유주의, 양극화만 불러

순 교수의 '경제학 원론'을 읽고 경제학 시험을 보고, 고(故)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을 읽고 운동을 하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으며 전복을 상상했던 이들에게 이제 '책'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다. 1980년대 영웅시대를 잊은 90년대 '동굴시대'의 책은 가난하다. 머리 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평생을 기댈 그런 책은 보이지 않는다. 사상이 거세된 시대에 남는 것은 실용이고 실물이다.

그것은 대개 합리로 위장되고, 실용주의로 포장되기 마련이다. 주의(主義)가 거한 시대에 남는 것은 또 기술이다. 부지불식간에 핏기없는 각종 교과서와 실용기술서, 어학교재가 남은 자리를 메우고 사회과학의 대권을 잇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이후 한국사회의 '국시'가 되어 버린 신자유주의는 그나마 성장-분배 사이의 실낱 같은 면피성 긴장을 해체해버렸다.

80년대 그래도 유지됐던 국민경제와 세계경제 사이의 대당(對當) 관계는, 국민경제의 자진해산을 통한 세계경제로의 핵치환 때문에 이제 그 경계선을 찾아내기가 몹시 난망하다. 세계화 시대에 국민경제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째 촌스럽다. K 폴라니란 학자가 아주 오래 전 갈파했듯, 19세기 이래 세계의 경제사는 사회에서 경제가, 경제에서 시장이, 시장에서 화폐가 분리 자립되는 바로 그 과정이다. 그것은 주(主)와 종(從)이, 주(主)와 객(客)이 뒤집어지는 역사였다.

세계화는 또 무엇인가. 바로 이 과정의 세계화가 아니던가. 이제 돈(=자본=투자)은 우리 사는 사회의 명실상부한 주인이다. 주는 그저 찬미의 대상일 따름이다. 효율성과 경쟁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지배 이데올로기다. 여기에 도전하면 그 날부터 찬밥이다. 도대체 경제란 무엇인가.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재화와 서비스에 의해 매개된 인간의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가 주도의 케인즈주의를 제압하고 이제 차세대를 바라보는 한국의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이 '관계'를 개혁함에 아무 희망이 되지 않음은 지당하다.

공자님이 그랬던가. "백성은 자신의 곤궁함이 아니라, 그 고르지 않음에 노여워한다." 아무리 우겨봐도 신자유주의는 양극화의 원인이다. 신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분배에 평등에 심지어 '국민경제'에 무차별적이다. 양극화된 민주주의는 정의상 그 자체로 반민주적이다. 신자유주의를 견제만 할 수 있어도 우리는 이미 새롭다.

이해영 교수 <한신대·국제관계학>

몰락한 좌파 이론, 새 포장도 소용없어

래 좌파 이론은 현실에 토대를 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인의 머리 속에 나온 이상향을 위한 염원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면 된다. 내가 알기에 자립갱생과 외세 배격 그리고 민족경제 우선을 내세웠던 좌파의 실험은 지구 어느 곳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다. 간단하다. 이론과 인간성에 대한 이해라는 면에서 심각한 오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됐던 이론인지도 모른다.

그런 좌파적 경제인식은 알게 모르게 우리 머리에 스며들었다. 대표적인 책이 1980년대 대학가를 풍미했던 고(故)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이다. 그것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좌파이론이 이 땅에 실천됐다면, 우리는 여전히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좌파는 몰락한 좌파를 새 포장지로 감싸서 대중과 정치인들을 설득하는데 열심이다.

그것은 현명하지 않을 뿐더러 비겁한 일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미 승부가 끝나 버린 게임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현실 사회주의는 몰락했지만, 이론 사회주의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대표적인 좌파 인사들을 나는 안다. 그들을 볼 때면 과연 생각이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사람이 생각을 바꾸기는 무척 힘들다. 게다가 지식인들이 생각을 바꾸는 것은 변절이란 소리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세계화를 통한 통합화의 길을 걷고 있다. 시장의 규모가 확대되고 교환의 영역이 확장되고 전문화의 추세가 가속된다. 이 과정에 어려움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자유로운 교역이 가져오는 혜택을 누린다. 세상을 어둡게 보는 사람들은 이런 양극화를 과대포장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자유시장경제원리를 충실히 하는 토대 위에서 해결 가능하다.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세상은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는 자들의 몫이다.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마땅히 존재해야 할 상상의 세계에 전부를 거는 사람들이라면 그 미래란 어둡다. 지금까지 좌파와 우파의 논쟁에 대한 글을 써왔던 필자는 그 일이 그다지 생산적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 이론적인 토대, 경험적인 사실을 곡해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면 좌파적 경제 인식이란 진실과 거리가 멀며, 더더욱 우리가 선택해야 할 대안은 못된다.

공병호 소장 <공병호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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