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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선진국’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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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코(線香) 불꽃놀이를 모르는 일본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손끝으로 집은 종이끈이 타들어 가면서 변화무쌍한 광채를 발한 불꽃은 이윽고 오렌지색의 동그란 구슬이 돼 땅 위에 떨어져 사라진다. 누구든 가족과 함께, 또는 누군가와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조그만 불꽃놀이다.

2002년 시작된 일본의 경기확대는 올 가을까지 이어지면 전후 최장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정보기술(IT)산업이나 자동차와 관련 서비스업 등에서 첨단기술 개발, 대형 설비투자가 속속 이뤄지고 있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잠재성장력을 높게 평가하며 최근의 상황을 불꽃놀이 진행 중으로 보는 낙관파가 있다. 반면 오렌지색의 광채(불꽃이 떨어질 때의 모양)로 해석하는 신중파도 있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인구 감소가 시작된 일본에서 중국이나 인도 같은 대형 불꽃놀이가 다시 벌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본의 국제수지는 지난해부터 해외투자 수익 등에 의한 소득수지흑자(11조3600억 엔)가 무역흑자(10조3500억 엔)를 웃도는, 이른바 연금생활형 성숙구조로 돌입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성숙구조 속에서 어떻게 풍요로움을 추구할 것인가. 경기회복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일본에 '과제 선진국'이란 방향성이 나타난 것이 긍정적 신호다.

'과제 선진국'이란 일본이 소자고령(少子高齡)화, 에너지.자원의 제약, 환경문제 등 언젠가는 서방 선진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직면하게 될 과제들을 가장 먼저, 그리고 심각하게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일본이 이를 극복함으로써 세계의 선두에 서자는 의미도 있다.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이유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이란 시장이 어느 나라보다 많은 수요를 갖고 있어 충분한 실험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일본의 기술은 우주공학 같은 전략적 시스템에는 약하지만 도요타의 '가이젠(改善)'이 세계 공통어가 된 것처럼 끊임없이 연구하고 궁리해 각종 제약을 극복하는 데는 비교적 강하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각종 제약에 도전하는 산업 대부분이 다양한 기술의 다양한 결합이 필요해 기술의 블랙박스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일본으로선 두터운 산업기반의 장점을 활용, 후발국과는 차별화를 이뤄낼 수 있다. 다른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관심도 대체로 비슷한 방향이다.

이 분야에서 처음 결실을 본 것은 하이브리드 자동차였다. 거의 모든 에너지를 해외에 의존해야 하는 취약함에 일본인들은 늘 고민해 왔다. 이 때문에 오일쇼크가 끝나고 유가가 떨어져도 일본 업체들은 환경문제와 연결시키며 에너지 절약형 기술의 연구를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너지 위기에 둔감한 미국 업체들과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 같은 제약극복형 산업은 고령화에 따른 첨단 의료기기, 각종 폐기물처리 시스템, 쓰나미 경보시스템 같은 재해 및 각종 환경변화 관련 분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다만 젊은이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하는 등 종전의 강점이 점차 사라지고 있어 과연 일본이 '과제 선진국'으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한국과 일본의 시장을 보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는 상관없이 이미 시장 차원에서 통합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또 한국의 제약요인은 급속한 고령화를 포함, 일본 사정과 흡사하다. 한국은 새로운 기술 및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확보하고 있는 '과제 선진국'의 실험장(일본)에 비자 없이 하루 만에 오고 갈 수 있고 언어장벽도 낮다. 나아가 한국은 마케팅 능력을 연마해 왔기 때문에 기회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신흥시장도 중요하지만 다음을 겨냥한 아이디어가 더 중요하다. 비즈니스맨은 미래를 내다봐야 할 것이다.

후카가와 유키코 도쿄대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