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원인 1위는 ‘부모 세대로부터 상속·증여’ 꼽아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65호 11면

[신년기획] 중앙SUNDAY-서울대 행정대학원 공동 <하> 소득 3만 달러 시대, 한국의 갈 길

중앙SUNDAY는 새해를 맞아 서울대 행정대학원과 공동으로 우리 사회 전반의 경쟁력을 점검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 대한민국의 갈 길’이란 기획물을 준비했다.



김시현(34)씨의 요즘 별명은 ‘잠수함’이다.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영남권의 한 소도시 출신인 그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서울 중위권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집안에서 석사는 그가 유일했다. 캐나다에 어학연수도 1년간 다녀왔다. 대학원을 마친 뒤엔 중견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대기업 생산직으로 정년퇴직을 한 그의 아버지(69)에게 김씨는 많이 배우고 잘 키운 아들 그 자체였다. 하지만 서른이 넘은 현재 김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 노량진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보다 못했던 친구들은 이미 고향에서 터를 잡았다. 그의 부모님은 고향에 자그마한 건물 한 채를 갖고 있지만 김씨에겐 겨우 몸을 누일 13㎡(약 4평) 남짓한 원룸이 전부다. 월세 45만원짜리다. 김씨는 “아버지는 노동자 계급으로 저만큼 삶을 일구셨지만 대학원까지 마친 나는 아무것도 해 놓은 게 없다”며 “어려서 한심하게 보던 ‘돈 좀 있고 공부도 못하던 친구’들을 따라잡기도 힘들 것 같다”고 한탄했다.

국민 75%“노력만으로 성공 어렵다” #“회의적” 5년 전보다 9%P 높아져 #“좋은 대학 졸업해도 취업 힘들어” #최우선 해결책은 “임금격차 해소”

2018년은 ‘선진국의 기준’이라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돌파가 예상되는 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사회가 공평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가 늘고 있다. 5일 서울대 행정대학원 서베이연구센터의 ‘2017 국민인식조사(이하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인의 노력을 통한 성공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4.64%가 “보통 이하”라고 응답했다. 5년 전보다 8.96%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인식조사는 지난해 말 전국 성인 6600여 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조사 결과는 중앙SUNDAY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응답자 87% “정부가 나보다 상위층 우대”

조사 결과 응답자의 87.42%(‘보통 이상’으로 응답한 비율)가 “정부가 응답자 본인보다 상위 계층의 사람을 우대한다”고 답했다. 정부조차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는 셈이다. 끊이지 않는 ‘갑질 논란’이나 ‘금수저론’ 등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회 내 불평등을 완화하는 일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꼭 해결해야 할 문제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최근 “높은 불평등 수준이 장기적 경제 성장에 불리하다”는 내용의 보고서(Equality and Efficiency:Is there a trade-off between the two or do they go hand in hand?)를 냈다. 금현섭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IMF가 주요 국가들의 장기적 경제성장률 유지 가능성과 불평등 수준 간의 관계를 살펴본 결과 국가별 불평등 수준이 높으면 경제성장률 유지 가능성이 작아지는 경향이 뚜렷했다”며 “국가별 정치제도나 무역 개방, 환율경쟁력 등 여러 요인 중 불평등이 경제성장률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직은 소수지만 불평등이 심화된 덕을 보는 이들도 있다. 주로 안정적인 자산기반을 갖춘 이들이 그렇다. 프리랜서인 윤소정(가명·35·여)씨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정규직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주 수입원은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과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40평대 아파트에서 나오는 월세다. 본인 명의의 아파트는 주로 외국계 기업의 한국 주재 임원들에게 세를 놓고 있다. 윤씨는 돈이 필요할 때나 본인이 원할 때 프로젝트성 일감을 따내 돈을 번다. 해외 유명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덕에 영어와 독일어에도 능통하다. 최근 3년 동안 그는 5곳이 넘는 기업을 옮겨 다니며 수개월씩 일했다. 윤씨는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혜택을 받고 산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며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어서 당분간은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물론 윤씨의 삶은 자신이 아닌 부모 세대가 쌓아 온 부 덕에 가능하다. 인식조사 결과에서도 응답자들은 우리 사회 내 불평등의 원인 중 첫째로 ▶윗 세대로부터의 상속·증여(34.31%)를 꼽았다. 이어 ▶정부 정책(20.52%) ▶교육 기회의 격차(16.72%) 등이 뒤를 이었다.

대기업 임원도 “공부 잘해도 소용없다”

대기업 임원인 김모(46)씨는 수년 전부터 자신의 아들에게 사교육에 큰돈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해 왔다. 남들처럼 아들에게 공부를 잘하라고 닦달하지도 않았다. 본인은 명문 사립대를 나와 경영학 석사(MBA)까지 마쳤다. 김씨의 아들은 올해 입시에서 수도권 소재 대학에 합격했다. 하지만 김씨는 그 결과에 만족한다. 그는 “어차피 좋은 대학을 나와도 대기업 취업이 힘들지 않으냐”며 “과거엔 교육이 확실한 계층 이동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교육 투자만큼 투자자본수익률(ROI)이 낮은 일도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대신 아들에게 대학 재학 중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을 것을 요구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김씨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본인의 사회적 지위가 있고 아들이 원하는 일을 찾는 데 필요한 지원을 해 줄 여력도 있어서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교육 자체가 별 의미가 없는 세상이 됐다”며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불평등이 심화되는 방향으로 갈 것이고 현재의 불평등 수준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기가 도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할 길은 없을까. 인식조사 결과 응답자들은 불평등 완화 방안(1, 2순위 대안 합산 비율)으로 ▶기업 내 임금 격차 해소(45.67%) ▶기업의 사회환원(45.03%) ▶개인의 노력(43.47%) 등을 꼽았다. 고용과 투자 분야에서 확실한 힘을 가진 기업의 노력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반면 저소득층 지원(34.48%)이나 고소득층 증세(31.37%)를 통해 불평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왔다.

그렇다면 정부의 재분배정책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금 교수는 “지나친 재분배정책은 시장경제의 유인구조를 침해해 투자와 성장을 저해할 수 있어 항상 조심스럽다”며 “그렇지만 최근 불평등 문제가 사회적으로 용인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고 지나친 불평등은 오히려 성장에 악영향을 주는 만큼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재분배정책 자체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전제돼야 한다. 현재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진단과 정책 우선순위와 관련한 사회적 합의 역시 필수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관련기사 
● 국민소득 높아질수록 불평등 수준도 커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