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기자 당신 일본 사람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일본지사장

서승욱 일본지사장

도쿄에서의 두 번째 특파원 생활, 정식 발령을 받은 지 열흘이 지났다. 지난달 말 하네다 공항에 내린 바로 그날부터 서울과는 180도 다른 도쿄를 새삼 실감했다.

사무실이 있는 긴자까지 큰마음 먹고 탔던 택시에선 일본 관광의 숨은 저력이라는 ‘오모테나시(진심이 담긴 환대)’를 제대로 경험했다. 서울 택시의 라디오 소음과 기사님의 전화 통화에 익숙해져서일까. 택시 안은 고요했고, 대형 여행가방 3개를 옮겨주면서도 기사님의 친절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7000엔(약 7만원)이란 거금이 아깝지 않았다.

반면에 그날 오후 휴대전화와 인터넷 개통을 위해 꼬박 네 시간을 통신회사 대리점에서 보낸 건 지금 생각해도 숨이 턱 막힌다. 듣는 사람도, 설명하는 사람도 지쳤을 텐데 막판에 동료 직원을 불러 자신이 처리한 내용이 맞는지를 두 번이나 재확인하는 대목에선 치밀하지만 융통성 없음에 한숨만 나왔다. 역시 그랬다. 일본이라고 전부 좋을 것도, 모두 나쁠 것도 없다. 배울 것도 있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도 있다.

도쿄 특파원의 숙명처럼 업무는 위안부 보고서 발표라는 대형 이슈로 시작됐다. 보고서 발표 하루 만에 나온 대통령의 메시지에 한·일 관계는 예상대로 출렁댔다. 그런데 과거와는 일본 내 분위기가 달랐다. 위안부 갈등 때마다 일본 정부의 진정성 없음을 더 꾸짖었던 진보 신문들의 접근법도, 아무튼 한국과는 잘 지내야 한다던 지한파 의원들의 기류도, 서울의 일본 대사관 출신 관료들의 태도도 달랐다.

이들은 “외교적 합의를 모두 공개하면 누가 한국과 협상하나” “국내 정치적 이유로 터진 문제를 왜 일본으로 가져오느냐. 한국과 합의할 때마다 한국 국민에게 여론조사를 실시해야 하느냐”며 국가 간 합의의 엄중함을 강조했다. 이런 기류를 신문에 보도했더니 돌아온 건 “기자가 일본 사람이냐” “역시 한 패거리”라는 모바일 댓글 전사들의 조롱이었다. “일본 내부 사정이 왜 중요한가” “지한파도 필요 없다”며 귀를 틀어막은 이들에게 일본 현장의 분위기 따위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4강에 둘러싸인 한반도, 이곳에 찾아온 초유의 안보 위기 속에서 제일 앞줄에 서 있는 외교 총사령관은 대통령이다. 물론 그렇다고 믿지만 대통령의 시각은 댓글 전사들의 수준과는 달라야 한다. ‘무조건 틀리고 무조건 맞다’가 아니고 ‘틀릴 수도, 맞을 수도,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다’는 신중하면서도 날카로운 계산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내건 ‘국민과 함께하는 외교’가 자칫 선거를 앞두고 일부 국민만 함께하는 ‘모 아니면 도’ 외교가 될까 걱정돼 하는 얘기다.

서승욱 일본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