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치기 통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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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71년의 노동관계법 파동은 영국의 회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우선 장시간 심의기록을 세웠다. 70년 12월 1일 법안이 하원에 제출되고 이듬해 8월 5일 여왕의 재가를 얻어 선포되기까지 9개월의 심의 투쟁과정이 볼만했다.
상원에서 만도 20세기 최장 심의기록인 62일 2백 41시간의 심의 끝에 1천 1백 건의 수정안을 받아 3백41개소의 수정을 가했다.
하원심의에선 기상천외한 사건도 잇달았었다. 철야농성 중이던 야당의원들이 갑자기 혁명가를 부르는가 하면 여성의원 「데블린」이 내상을 구타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하지만 야당인 노동당은 표결의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야간교대제를 실시, 노령의원에겐 집에 돌아가 쉬도록 했다. 이에 대응해서 보수당도 교대제를 취했다. 방청객들에겐 일종의 유쾌한 경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의회 밖에선 노조에 의한 총파업과 수십만 명의 대규모 데모가 진행 중이었지만 의회 내 절차만은 철저히 밟았다.
물론 영국의회가 채용한 세 가지 입법촉진 수단도 어김없이 동원됐다.
첫째는 토의 중단. 의원 1명이 시간을 끌지 말자고 의결을 동의하면 즉각 단순다수결로 토의중단을 결정한다. 다만 소수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의장이 생각할 때는 이를 거부할 수 있다.
둘째는 길로틴. 프랑스 의수 「기요틴」이 고안한 이 사형장치는 영국의회에서 심의시간 할당규칙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셋째는 캥거루. 의장 또는 위원장이 제안된 수정안을 선택 또는 거부할 수 있는 권능이다. 심의과정에서 의원들은 많은 수정안을 내놓기 때문에 의장은 가끔 시간절약 상 권한행사를 하곤 한다.
의사진행의 효율 상 그런 수단들은 모두 정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영국의회가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예는 없다. 그런 야비한 짓을 하는 여당이 있었다는 얘기도 없다. 당당하지 못한 수단은 적어도 국민의 의회에선 있을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우리 국회 내무위, 법사위, 본회의가 차례로 여당의 선거법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전에 횡행하던 못된 국회운영관례가 6공화국에선 없으려니 했던 국민의 기대도 이젠 물거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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