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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막힌 비상구, 불법 주차, 스티로폼 … 늘 10가지가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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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9명이 숨진 충북 제천 복합상가건물 화재는 ‘후진국형 복합 인재(人災)’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해당 건물의 불법 행위에다 법·제도적 문제, 소방의 초기 대응 부실, 시민들의 불법 주정차 등 준법의식 결여 등이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이 보는 고질병과 처방 #화재 인명구조 골든타임은 5분 #불법 주차 차량 부수고 진입해야 #건물엔 비상 방송시설 의무화 #위법한 설계·시공·감리엔 징역형 #소방 인력·장비 우선해서 확충 #지자체·소방서 건물정보 공유를

전문가들은 “반복되는 후진적 참사를 멈추려면 안전에 대한 국민의식 개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화재 참사 와중에 드러난 10가지 고질병을 추려 보고 전문가들의 처방을 들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1 제구실 못하는 비상구

이번 화재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비상구 폐쇄’가 꼽힌다. 비상구가 막힌 2층 여탕에서는 전체 사망자 29명 중 20명(모두 여성)이 희생됐다. 3층 남탕처럼 비상구를 통해 비상계단으로 대피했다면 인명 피해를 크게 줄였을 것이란 말이 나온다. 이 건물에는 화재를 알리는 비상 방송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2 소방차 진입로 막은 불법 주차

소방 당국은 인명 피해가 컸던 이유로 폭 6m 도로 양쪽에 있던 불법 주정차를 꼽았다. 화재 때 초기 진압과 인명 구조 ‘골든타임’은 5분 이내다. 현장에선 “촌각을 다툴 때는 불법 주정차 차량을 부수고라도 화재 진압장비를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서는 ‘화재와 구출 서비스법’에 따라 차량 소유주의 동의 없이 차를 옮기거나 부술 수 있다.

3 대충대충 ‘셀프’ 소방안전점검

화재가 발생한 건물은 지난달 30일 건물주가 외부 업체에 의뢰해 소방안전점검을 진행했다. 누수와 방화셔터 작동 불량 등 결함이 발견됐다. 하지만 소방서에 점검 결과가 통보되기 전 사고가 발생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의뢰를 받은 업체가 2층 여탕을 빼놓고 점검했다는 것이다. 비상구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적치물이 쌓여 있었다.

4 싸구려 건축자재가 불쏘시개 역할

이 건물 외벽은 ‘드라이비트(drivit)’ 공법을 적용했다. 경기도 의정부 화재와 고양터미널 화재 모두 외벽에 같은 공법이 사용됐다. 스티로폼이 주재료라 가격은 불연성 외장재의 3분의 1 수준이다. 정부는 건축물을 부실 시공한 건축사나 시공업자는 형사 고발하고 위법한 설계·시공·감리자는 3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을 강화하기로 했다.

5 건축시기·면적 따라 규정 달라

건축법상 6층 이상 건축물 등은 외벽 마감재로 불에 잘 타지 않는 자재를 써야 한다. 9층이면서 연면적이 3813㎡인 제천 복합상가건물 역시 적용을 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조항이 시행된 건 2010년 12월 19일부터다. 이 건물은 그해 7월 준공됐다. 정부는 2013년 건축법을 개정해 31m 이상 건물은 제연설비를 갖춘 비상 엘리베이터 설치를 의무화했다. 제천 복합상가건물은 높이가 31.75m이지만 2011년 준공돼 규정을 적용받지 않았다. 특별대책이 필요한 대목이다.

6 불법 증·개축 남발

불이 난 건물은 2010년 8월 9일 7층으로 승인받은 뒤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8층과 9층이 증축됐다. 서류상으로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다. 하지만 9층 53㎡는 불법 증축된 것으로 경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건물주가 9층을 불법 개조해 직원 숙소용 주거공간으로 사용해 온 사실도 밝혀졌다. 지난 7년간 현장점검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7 열악한 소방장비·인력

이번 사고로 소방의 열악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났다. 인구 13만 명이 사는데 제천소방서가 보유한 고가사다리차와 굴절차는 각각 1대뿐이다. 고가사다리차는 40m, 굴절차는 25m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인력 부족도 심각하다. 제천소방서는 화재 진압요원 30명이 3개 119안전센터에서 3교대로 근무한다. 구조요원도 12명이 4명씩 3교대로 일한다. 이번 화재 때도 구조요원 4명이 고드름 제거작업을 하러 갔다가 현장으로 달려왔지만 신고 17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예산과 인력을 확충해야 하는 이유다.

8 느슨한 긴급출동 준비 태세

화재 발생 당일 굴절사다리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고층에 대피한 사람들을 구하는 구실을 못했다는 유족과 시민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소방 업무 특성상 24시간 출동 대기를 해야 하지만 겨울철에는 동파 등에 대비해 장비 점검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9 정부·소방·지자체 건물정보 따로따로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는 건물의 설계도를 챙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상계단 등 건물의 정확한 구조를 알지 못해 진입이 늦어지면서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소방차·구급차가 출동하면 소방본부와 소방서는 건물 데이터베이스(DB) 자료를 검색, 설계도를 현장 지휘부로 전송하고 이를 받아 본 현장에서는 건물 구조와 비상구 등을 파악하고 인력을 어느 곳으로 투입할지를 판단한다. 전국 소방서는 주요 건물에 대한 설계도를 확보하고 있지만 증축 등 변경사항은 지자체로부터 실시간 전달받지 못하고 있다. 정보 공유가 절실하다.

10 잠자는 소방 관련 법률

내년부터 소방차 진로 양보 의무를 위반하는 차량은 과태료가 2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대폭 상향 조정된다. 골든타임을 확보해 고귀한 생명을 구하자는 취지에서다. 이는 차량이 도로 위를 달릴 때만 해당한다. 불법 주정차 차량은 제외된다. 골목길 모퉁이나 소방시설 주변을 ‘주정차 특별금지구역’으로 정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올 3월 발의됐다. 현행보다 2배 이상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내용이다. 개정안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된 뒤 이렇다 할 논의 없이 잠자고 있다.

제천=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도움말 주신 분=박충화 대전대 안전방재학부 교수,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 인세진 우송대 소방안전관리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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