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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해병학교 출신 월남전 전우들의 50년 우정…송재신 회장과 35기 '영원한 해병'

중앙일보

입력

사선을 넘나들며 다져온 전우애를 잊지 못해 50년을 변함없이 만나며 우정을 다져온 노병들이 있다. 송재신 회장과 해병학교 35기 출신 교육생들이 그 주인공이다.

2017년 10월 26일, 50년 전을 거슬러 송재신 중대장과 해병학교 35기 교육생들이 함께 모여 밤늦도록 사제 간의 정과 형제애를 나눴다.

2017년 10월 26일, 50년 전을 거슬러 송재신 중대장과 해병학교 35기 교육생들이 함께 모여 밤늦도록 사제 간의 정과 형제애를 나눴다.


병역의무를 마친 남자들이 만나면 빼놓지 않고 하는 농담이 있다. ‘제대하고 나면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눈다’는 말이다. 하지만 해병대 출신들에겐 예외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가 상징하듯 끈끈한 결속력을자랑한다. 해병대의 응집력은 연령과 세대를 초월한다.

중대장과 교육생으로 만난 인연을 반세기 사제 간 정 이어와… #후배 전우들 격려하고 지원, 해마다 만남 갖고 나라사랑 다짐

2017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압구정동의 한정식 집에 20여 명의 노신사가 모여들었다. ‘해병학교 35기 동기회’(회장권오찬) 회원들이었다. 70대 중반이 된 노병들 사이에 앉아있는 백발 성성한 80대의 노신사가 눈에 띄었다. 참석한 인사들마다 그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중대장님!’이라고 부르며 잔을 부딪쳤다. “미국 LA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신 송정 (松井) 송재신 회장이십니다.” 모임을 주최한 한 인사가 귀띔해줬다.

송재신(宋在新·83) 회장은 충남 부여 출신으로 1973년에도미(渡美)해 의류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다. 한때는 전도양양한 해병장교로서 상급자와 후배 장교들로부터 두루 신망받던 해병장교의 표상이었다. 해군사관학교(14기)를 졸업한 송 회장은 미국에서 2년간 미 해병학교 기초반(OBC)과정을 수료한 뒤 진해 해병교육기지 교관으로 복무했다.1966년 5월에는 해병학교 중대장으로 부임해 35기 교육생과 인연을 맺기에 이른다. 1951년 11월 개교 이래 최초의 해사 출신 해병학교 중대장이었을 정도로 엘리트였다고 한다.

장성 두 명 배출한 해병학교 35기

해병대 예비역들 중에서도 해병학교 출신 사관후보 35기는지금도 특별한 기수로 대접받는다. 한 기수에 장군이 한 명나오기도 힘든데 두 명의 장성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전도봉중장(76, 제22대 해병대사령관)과 이영세(73) 준장이 그 주인공이다.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기업인도 많다. 김무일(74) 전 현대제철 부회장이 대표적이다. 35기 부중대장이자 진해 교육기지사령부 의장대장으로 활약한 그는 월남전에 참전해 전투부대인 청룡부대 수색중대 1소대장으로 복무했다. 대위로 예편한 뒤에는 현대그룹에 입사해 현대·기아차 부사장, 현대제철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해강회(해병학교 강남지역 직장친목회) 회장에다 해병대소설가회소설집 <전선 소야곡>(2015)을 펴낼정도로 다재다능해 35기의 구심점이되고 있다.

기자에게 송재신 회장과 35기 노병들의 모임이 특별하게 다가왔던것은 1966년 첫 인연을 맺은 이후 51년 동안이나 끊이지 않고 만나 사제의 정을 나누어왔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반백 년 세월을 이어온 전우애의 바탕에는특별한 사연이 있을 법했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다. 1966년 8월 8일 해병학교 35기 기초반소위 129명이 김해비행장을 습격한 ‘8·8 김해비행장 사건’이 그 배경이다. 사건의 발단은 주말을 맞아 부산에서 외박을 마친 해병학교 35기 기초반 소위 7명과 김해 공군비행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던 공군 소위 10명이 사소한 시비 끝에 싸움을 벌이면서 시작됐다. 격투 끝에 공군 소위들이 두들겨맞고 귀대하자 화가 난 공군 장교들이 트럭을 타고 귀대하는 해병들을 쫓아와 폭력을 휘둘렀다. 공군 장교들의 몽둥이에 맞은 해병대 장교 한 명이 중상을 입고 진해병원으로 후송되자 35기 교육생들이 분노했다.

"백발의 노병들이 ‘소대장님!’ ‘중대장님’서로 깍듯이 부르면서 예의를 지키고 잔을부딪쳤다. 50년 세월 동안 한결같이 맺어온특별한 인연이었다." 

급기야 35기생 129명은 망가진 해병 장교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새벽에 진해에서 기차를 타고 김해비행장까지뛰어가 공군 장교들을 기습한다. 새벽 기상 나팔소리에 일어났다가 졸지에 기습을 당한 공군 장교 50여 명이 침상 위로꼬꾸라졌고, 공군 사병들까지 가세하면서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예상치 못한 새벽녘의 활극으로 해병학교 35기생 소위 한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당시 사건을 설명하던 한 인사는 “젊은 혈기에 자존심 문제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해외 토픽에 나올 만한 얘기”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사건의 파장은 컸다. 공교롭게도 진해 저도에서 휴양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가 철저한 진상 조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지휘관과 35기 주동자들이 군 검찰에 구속됐다. 당시 이 사건을 접한 박 대통령이 “공군이 해병대한테는 (상대가) 안 될 걸!”이라며 내심 해병대의 손을 들어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 사건의 등장인물들도 거물급이다. 최초 사건의 발단이 됐던 35기 주동자 중 한 명이 나중에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전도봉 중장이다. 8월 8일 새벽에 기습당한 공군 부대 당직 사령실 장교는 이양호 대위로 나중에 국방부 장관이 됐다. 당시 공군 측 부상자 중 한 명이 훗날 공군참모총장까지진급했는데 바로 이억수 대장이다. 당시 해병대 소위들을 취조했던 법무감은 이양우 대위로 1987년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우리 군 역사에서 유례없는 이 사건의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자매결연’으로 봉합됐다고 한다. 전도봉 중장의 회고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송재신 회장은 충남 부여 출신으로 1973년에 도미해 의류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다.

송재신 회장은 충남 부여 출신으로 1973년에 도미해 의류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다.

“당시 강기천 해병대사령관은 고민에 빠졌다. 자존심 싸움에서 벌어진 사건을 엄히 다스렸다가는 35기소위와 후배들의 사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강 사령관은 묘안을 하나 짜냈다. 35기 장교와 비행학교 장교들 간에자매결연을 하는 것이었다. 강 사령관은 당시 장지량 공군참모총장에게 동의를 얻어 김성은 국방부 장관에게 건의했다. 그러자 김 장관은 청와대로 달려가 박정희 대통령에게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자매결연 문제를 건의했다.결국 강 사령관과 장 총장은 각각 서로의 부대를 방문, 젊은장교들에게 유감을 표명했고, 나중에는 자매결연까지 하게됐다.”

당시 송재신 중대장은 35기생들의 ‘거사’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사건을 막지 못한 지휘관의 책임을 물어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결국 군사재판까지 받고 보직 해임됐다. 송재신 회장은 “해병학교를 떠날 때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다 키운 내 자식을 남한테 맡기고 떠나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송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대위로 복귀해 1967년 청룡부대 보병 중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바탄강 상륙작전’에 참여해 전과를 올렸고 ‘용화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미국 정부가 주는 은성무공훈장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사건의 영향으로 소령 진급이 좌절되자 결국 대위로 전역했다.

송 회장이 겪은 ‘8·8 사건’이 불러온 불행이 전화위복이었을까. 송 회장은 1973년 미국으로 이민한 뒤 의류사업을 일궈 성공했고, 현재도 사업체를 운영하며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토대로 <나의 성공DNA를 찾아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군인의 길에서 사업가로 변신해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면서 송 회장의 해병대 사랑은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그중 하나가 미국의 유력 영화사 부사장으로 미국 사회에서 이름을 떨칠 정도로 성공하면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35기 교육생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35기 교육생 입장에서도 당시 8·8 사건은 동기생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한 노병은 “그 사건이 없었으면 우리 35기는 그냥 평범한 기수가 됐을 것이다. 송 중대장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을 탕감받기 위해서라도 더 자주 만나고 끈끈하게 전우애를 다져나갔다”고 말했다.

"내 자식, 내 가족만 잘되려고 하면 안 된다. 내 나라가 있어야 나도 있는 것이다. 나라가 잘돼야 한다."

군인의 길 접고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 

송재신 회장은 미국에 사는 한국인 해병대들의 모임엔 꼬박꼬박 참석하는 것은 물론 매년 한두 차례씩 꼭 방한해 35기생들을 격려하고 지원했다. 2016년 5월 35기 임관 50주년 기념문집 <질풍> 출판 때는 300만원을 쾌척했고, 2005년 인천맥아더장군 동상 수호활동에 나선 해병전우회에 격려금 1만5000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대선을 앞둔 2017년 3월에는 시국집회에 나선 해병학교 후배들에게 보태달라며 3000달러를 보내왔다고 한다.내 자식, 내 가족만 잘되려고 하면 안 된다.내 나라가 있어야 나도 있는 것이다.나라가 잘돼야 한다.송재신 회장은충남 부여 출신으로1973년에 도미해의류사업으로성공한 사업가다.

송 회장은 미국에 머물면서도 해병대 인터넷 사이트를 자주 클릭해 35기 옛 부하들의 동정을 살필 정도로 교육생 제자들을 아꼈다. 35기생들도 송 회장의 인품을 존경하며 늘 차렷자세로 경례하며 ‘영원한 중대장’으로 모셨다. 2015년에는 송회장과 35기 동기생들이 그동안 맺은 사제 간의 정에서 발전해 ‘형과 아우의 연’을 맺었고, 송 중대장에게 송정(松井)이라는 아호를 헌정했다. 아름다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동기생들의 전우애가 깊어진 데는 월남전 참전의 경험도크게 작용했다고 했다. 당시 월남 정부가 1개 전투사단의 증파를 요청하자 박정희 정부는 국회 동의를 얻어 1965년 10월 9일 해병 제2여단을 파병한다. 이에 따라 대부분 61, 62학번이었던 35기 동기생 140명 중에서 90여 명이 1966~67년월남전에 참전했다. 당시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은 1972년2월까지 월남의 ‘깜라인’ 지역에 주둔하면서 짜빈동 전투,베리아 상륙작전 등에서 명성을 날렸다.

짜빈동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박종환(74, 전 대한냉열주식회사 사장) 씨는 “당시 1개 분대 병력으로 베트콩 1개 중대 병력을 무찔러 채명신 파월한국군총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부대원들을 격려할정도로 큰 전공을 세웠다”고 말했다. 지금도 해병대기념관에는 당시 박종환 소대장의 공적과 훈장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월남전참전으로 해병대원들이 당한 피해도 적지 않았다. 청룡부대는 총 3만7340명이 베트남전에 참전해 해병대 장교 42명, 사병 1160명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조국애를 실천하는 해병대의 용맹성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미국 해병대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도 실은 미국 해병대에서 따온 것이다. 1987년 개봉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영화 <폴 메탈 재킷(Full Metal Jacket)>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들이 죽는 그날까지 어디에 있건 모든 해병은 너희들의 형제다. 너희들 대부분은 베트남으로 가게 될 것이다. 너희들 중 일부는 살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항상 기억해라. 해병은 죽게돼 있다. 그러자고 우린 여기에 왔다. 하지만 해병대는 영원하다. 고로 너희들도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송재신 회장과 노병들은 이날 밤이 늦도록 잔을 부딪치며50년 세월을 뛰어넘어 전우애를 다졌다. 한 노병이 “해병학교 교육생 때는 감히 중대장님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우리가볼 때는 하느님이었다”고 교육생 시절을 회고하자 송 회장은 “참 특별한 인연이다. 하늘이 우리의 인연을 맺어준 것 같다”며 고마워했다.

35기 동기회 장수근(73) 총무에 따르면 해병학교 35기는 총 142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월남전에서 전사했거나 세상을 달리한 사람이 24명, 해외에 나가있는 동기생이 11명이라고 했다. 그래도 정기 모임 때는 항상 70~80명이 달려온다고 했다.

사제 간의 정, 형제의 정으로 이어져 

매년 봄과 가을에는 부부동반 버스투어를 통해 전우애를 다지고, 송재신 중대장의 방한 때는 열 일을 제쳐놓고 모인다.김무일 전 동기회장은 “송재신 중대장님으로부터 훈육받은해병대 정신이 50년 동안 전우애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바탕이 됐다”며 “모임을 하면 늘 사제지정(師弟之情)과 형제의 정이 넘친다.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보기 드문 소중한인연이다”고 말했다.
그날의 송년모임으로부터 사흘 뒤인 10월 29일, 송재신회장은 35기 동기회의 공식 명칭인 노도(怒濤)회 회원들과속리산 화양구곡(華陽九曲)으로 추계 버스투어를 떠났다.

김무일 전 동기회장은 “송재신중대장님으로부터 훈육받은 해병대 정신이50년 동안 전우애가 끊어지지 않고이어지는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매년 봄·가을 두 차례 개최하는 버스투어는 노병들의 ‘인생동지’인 부인들을 동반한다. 송재신 회장도 아내 최유식(75)씨와 함께 다녀왔다. 여행에 참석한 한 노병의 아내는 “살다보면 해병의 아내도 자연히 해병이 된다. 군가도 다 들어서외울 정도가 됐다. 50년을 만나왔으니 서로간에 모르는 부부가 없다”고 웃었다.

충북 괴산에 자리한 화양구곡은 조선 중기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이 화양계당(華陽溪堂)이라는 집을 짓고8년간 은거한 유적지다. 송재신 회장은 우암의 11대손이라 감회가 새로웠다고 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도 우암의 13대손이라고 했다. 귀경하는 버스 안에서 ‘인생은 늙어가는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입니다’라는 의미 깊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1992년 LA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한국 교민들이 공권력에 의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그때 예비역 해병대들이 어느 사이에 군복을 입고 나타나면서 한인들을 위한 자경단(自警團)이 만들어졌다. 그 자경단이 끝까지 그 마을을 지켰다. 해병대는 이처럼 응집력이 있다. 아침마다 자발적으로 교통정리를 하고 순찰을 돈다. 해병대원들 스스로 돈을 추렴해서 남을 돕는다. 나라가 힘들때 나설 사람은 우리 해병대 출신들이다.” 김무일 전 동기회장의 말이다. 50년의 전우애가 변치 않고 이어지고 있는 이유를 알 만했다.

송재신 회장이 헤어지면서 깊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 산 지 30년이 넘은 미국 시민권자다.하지만 늘 조국을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이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고 술독에 물을 넣어버리면 결국 술이 안 되고 물이 된다. 내 자식, 내 가족만 잘되려고 하면 안 된다. 내 나라가 있어야 나도 있는 것이다. 나라가 잘돼야 한다.” 고매한인격에 애국심 가득한 팔십 노병의 고언이었다.

나권일 월간중앙 기자na.kwonil@joongang.co.kr

사진 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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