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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재발견] 신수원 감독의 밀실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M] 뒤늦게 영화를 시작했지만, 신수원 감독의 영화는 빠른 속도로 여물어갔다. 첫 장편 ‘레인보우’(2010), 옴니버스 ‘가족 시네마’(2012)에 수록된 단편 ‘순환선’, 이어진 ‘명왕성’(2013) ‘마돈나’(2015)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유리정원’(10월 25일 개봉)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짧지만 단단하며, 그 안에선 독특한 공간적 모티프가 반복된다. 바로 ‘밀실’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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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원은 ‘공간’의 감독이다. 특히 외부와 차단된 공간, 캐릭터 홀로 존재하는 닫힌 공간, 은밀한 일이 일어나는 비밀의 공간 등 ‘밀실’의 컨셉트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중요한 이미지다. 이런 설정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그의 캐릭터들은 모두 심리적·물리적·사회적으로 갇혀 있기 때문이다. ‘유리정원’의 재연(문근영)은 내면의 강박에 짓눌려 식물의 삶을 희망한다. ‘마돈나’의 미나(권소현)는 하층 노동자로서 사회 밑바닥을 떠돌다 병원으로 실려 간다. ‘명왕성’의 고3 학생들, ‘순환선’의 실직 가장, ‘레인보우’의 데뷔를 꿈꾸는 영화감독 모두 심리적 억압 상태에 놓여 있다. 신수원 감독은 그 상황을, 그들을 가두고 있는 공간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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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인 ‘유리정원’을 보자. 재연이 살던 공간을 소설가 지훈(김태훈)이 차지하게 되면서 이 영화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 공간은 바로 옥탑방. 낮은 지붕이 짓누르는 듯한 그곳(사진1)은 도시 안의 고립된, 마치 섬과 같은 공간이다. 문단에서 퇴출당한 지훈은 그곳에서 재기를 꿈꾸는데, 이때 벽에서 재연의 글을 본다. “나는 나무에서 태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내 몸 속엔 초록색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글 아래엔 태아처럼 웅크린 사람의 그림이 있다(사진2). 재연의 내면을 형상화한, 갇힌 인간의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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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을 떠나 재연이 간 곳은 숲 속의 유리정원(사진3). 이곳에서 재연은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지훈은 그곳을 찾아간다. 결국 재연의 위험한 실험은 지훈에게 발각되는데, 그곳은 유리정원 옆의 토굴(사진4)이다. 이처럼 영화 ‘유리정원’은 ‘연구실-옥탑방-유리정원-토굴’로 이어지는 일련의 닫힌 공간을 통해 영화의 기승전결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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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순환선’의 지하철도 인물의 단절감을 표현하는 일종의 밀실이다. 상우(정인기)는 실직 상태를 숨기고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 순환선인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싣는다(사진5). 그는 하루 종일 그곳에 갇혀 있는 셈인데, 이것은 시스템에서 도태된 인간의 쳇바퀴 도는 듯한 삶에 대한 의미심장한 메타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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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에선 작업실이 그런 기능을 한다. 불혹의 나이에 영화감독의 꿈을 불태우는 지완(박현영)은 어느 영화사에서 첫 작품을 준비한다. 이때 주어진 널찍한 작업실은 점점 지완을 옥죄고, 결국 지완은 아무 소득 없이 그곳을 나온다(사진6).

특히 이 영화는 계단이라는 구조물(사진7)을 반복하며 통해 인물이 갇힌 상황을 보여주는데, ‘계단’은 이후 감독의 영화에서 꾸준히 반복되는 모티프다. ‘명왕성’ 역시 캐릭터를 가두는 이미지로 계단을 사용하며(사진8), ‘마돈나’에선 미나가 폭력을 경험하는 공간이다(사진 9). ‘유리정원’에서 재연은 불편한 다리로 힘겹게 철제 계단을 올라 꼭대기 옥탑방으로 올라가는데(사진10), 여기서 계단은 자연을 떠난 재연의 힘겨운 삶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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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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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원 감독의 밀실이 지니는 또 하나의 의미는 폭력이다. ‘명왕성’의 고등학교는 그래서 상징적이다. 그 건물은 과거 정보기관에서 쓰던 곳. 엘리베이터 뒤의 비밀 공간은 스터디 그룹 아이들의 아지트인데, 과거 고문이 이루어졌던 곳이다(사진11). 철창마저 있는 그곳은 ‘학교=감옥’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내며, 실제로 아이들은 그곳에 갇힌다(사진12). 내내 꽉 짜인 격자 구도의 미장센이 반복되는 ‘명왕성’은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낸 편집증을 억압적 공간으로 드러내며, 여기서 아이들은 사라지거나 맞고 때리거나 미쳐간다. 이것은 군부 독재 시절의 국가적 폭력을 연상시키는 모습이기도 하다.

사진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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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신수원 감독은 한 사회와 국가의 시스템이 개인을 어떻게 공간적으로 규정하는지 보여준다. 옴니버스 ‘이제 난 용감해질 거야’(2010)에 수록된 단편 ‘집’은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사례다. 한 소년(백시명)이 있다. 굉음에 잠에서 깨어 보니 집이 철거되고 있고, 소년은 짐을 챙겨 거리로 나온다. 이때 그가 결국 집으로 삼는 곳은 공중전화 부스(사진13).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한 개인은 한 평도 채 안 되는 곳으로 쫓겨난 셈이며, 그곳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밀실’이라는 컨셉트를 가장 극적으로 활용한 영화는 ‘마돈나’다. 사무실의 칸막이(사진14), 해고 통지를 오피스 룸(사진15), 공장 컨베이어 벨트 그리고 홍등가의 말 그대로 ‘빨간 방’(사진16). 이 공간들에서 미나는 착취당하고 유린당한다. 결국은 의식 불명의 임산부가 되어 병원에 실려 와 병실에 갇힌다(사진17). 그 반대편엔 VIP 병실이 있으며, 미나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될 상황에 처한다.

닫힌 사회의 모순을 떠안은 존재들과 그들을 가두는 밀실의 미장센. 신수원 감독의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절박하면서도 심각한 풍경이다. 그렇다면 최근작 ‘유리정원’에 판타지 요소가 등장한 건, 어떤 희망을 품어 보려는 감독의 작은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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