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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취향과 기호로 부활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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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호 29면

책을 넘기다 마음 속을 훅 파고드는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바닷가, 저 멀리 초승달이 떠 있고 길게 머리를 딴 한 여성이 달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다. 스웨덴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가브리엘 이삭의 ‘어둠 속의 빛(Illumination in the dark)’이다. ‘우울과 함께 하는 여정’이란 시리즈로, 주로 가만히 서 있는 여성의 뒷모습을 찍은 이 작가의 사진은 몽환적이고 쓸쓸하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젠더 이슈 담은 잡지 ‘우먼카인드’ 창간

사진이 실린 곳은 지난달 새로 나온 잡지 ‘우먼카인드(사진)’.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테마로 2014년 호주에서 발간된 잡지다. 최근 바다출판사가 판권을 사 한국판을 시작했다. 주말에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잡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는 드문 경험을 했다. SNS에 올라오는 독자들의 반응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출간 3주 만에 1500여 부가 발행됐고, 정기 구독 신청도 이어지고 있다.

잡지의 전성시대는 끝난 지 오래라 생각했으나, 몇 년 전부터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대형 서점의 잡지 코너를 가 보면, 익숙한 시사 주간지와 여성지 사이로 처음 보는 단아하고 예쁜 잡지들이 다수 놓여 있다. 핵심은 ‘전문성’과 ‘취향’이다. 과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늘면서 2015년 한국판이 나온 ‘스켑틱’에 이어 올 가을 두 개의 과학 잡지가 창간됐다. 일본의 교양과학잡지인 ‘대인의 과학’ 한국어판인 ‘메이커스: 어른의 과학’과, 과학책 전문출판사인 이음이 내놓은 과학 계간지 ‘에피’다.

광고가 가득한 패션·리빙 잡지가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 잡지의 선전도 눈에 띈다. ‘킨포크’ ‘베어’ ‘매거진B’ 등이 있고, 주거 공간에 초점을 맞춘 ‘매거진 브리크’도 최근 창간됐다. ‘볼드저널’은 아예 3040 기혼 남성을 타깃으로 삼았다. ‘월간잉여’ ‘계간홀로’ ’퇴사의 이유’ ‘소문자 에프’ 등 소규모로 발행되는 독립 잡지의 스펙트럼은 나날이 풍성해지고 있다.

‘스켑틱’과 ‘우먼카인드’를 펴냈고, 내년 1월 생활철학 잡지 ‘뉴 필로서퍼’를 창간하는 바다출판사의 김인호 대표는 “독자들의 관심과 기호가 세분화되면서 모든 것이 담긴 말 그대로의 ‘잡지(雜紙)’가 아닌, 특정 분야를 깊이 파고들거나 소수의 취향 공동체를 겨냥한 잡지가 호응을 얻고 있다”고 했다.

최근 나온 『2018 대한민국 트렌드』는 ‘철저히 개인화된 형태의 사회성(Hyper-customized Sociality)’이란 말로 다가올 사회를 전망한다. ‘나 홀로’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막연한 교류나 친목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뚜렷한 목적을 갖고, 정치적 입장이든 팬덤이든 관심사를 위주로 구성된 ‘뾰족한 초점을 둔 인간관계’를 지향한다. 콘텐트 소비도 마찬가지다. 그냥 즐거움을 위한 책보다는, 자신의 관심사를 명확히 집어내는 책에 기꺼이 지갑을 연다. ‘잡(雜)하지 않은 잡지의 시대’도 이런 흐름을 타고 우리에게 왔다.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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