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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재발견] '고령가 살인 사건'의 전등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M] 최근 개봉작 중 가장 기적 같은 작품은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이하 ‘고령가’)일 것이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양 감독은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그의 대표작인 ‘고령가’는 영화가 만들어졌던 1990년대 초 한국 개봉을 계획했지만 긴 상영 시간 때문인지 결국 극장에 걸리지 못했던 작품. 하지만 26년 만에, 그것도 3시간 57분의 디렉터스 컷 그대로 극장의 큰 화면에서 관객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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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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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에 달하는 상영 시간을 제대로 지탱하려면, 일단 감독에게 영화 전반을 장악할 수 있는 미학적 내공과 스타일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엔 많은 캐릭터가 가세하기 마련이고, 스토리 전개를 위해 다양한 모티프가 사용된다. ‘고령가’도 마찬가지다. 샤오쓰(장첸)와 밍(양정이)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이 자연스럽게 결합되며 등장하는 수십 명의 캐릭터들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어우러진다. 반복되는 모티프들은 일상적이면서도 매우 효율적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 사무라이 칼과 단검, 시계, 아구 배트….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전구와 손전등이다. 밤 장면이 적잖고, 실내 장면이 전반적으로 어두운 이 영화에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구나 샤오스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손전등에서 나오는 빛은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아예 영화는 전구를 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고령가’의 첫 신. 누군가의 손이 화면으로 들어와 화면 중앙의 전구를 켠다(사진 1). 이 장면은 상영 시간이 세 시간 정도 흘렀을 때, 그 숨겨진 의미를 드러낸다. 야간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샤오쓰는 건달은 아니지만 모범생도 아닌, 얌전하고 평범하지만 다소 예민해 보이며 폭력적 성향도 지닌 열네 살 소년이다. 아버지(장국주)는 아들 때문에 여러 차례 학교에 불려 오는데, 선생님과 아버지 앞에서 샤오쓰는 야구 배트로 교무실의 전구를 박살낸다(사진 2).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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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를 켜면서 시작한 영화에서 이 대목은 인상적이다. 이전까지 샤오쓰에게 쌓여온, 특히 밍과의 관계 때문에 응축된 걷잡을 수 없는 내면의 폭력성은 ‘전구를 깬다’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며, 결국 샤오쓰는 퇴학 당하며(시스템에서 제외) 이후 교도소에 간다(사회에서 격리). 한편 ‘고령가’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전구는 동료 감독인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1989) 첫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고령가’가 1960년대 대만 사회를 뒤흔들었던 실화인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다면, ‘비정성시’는 1940년대 대만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출산 장면으로 시작하는 ‘비정성시’의 첫 신엔 어두운 실내를 비추는 전등이 등장하는데(사진 3), 그 느낌은 ‘고령가’와 매우 흡사하며 일종의 오마주일까 싶기도 하다.

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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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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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는 빛을 아끼는 영화다. 실내 신은 대부분 로우 키 조명이고 광원도 극도로 제한된다. 이것은 당시 대만의 원활하지 못했던 전력 수급을 반영하는데, 영화에도 등장하듯 툭하면 정전이 되었던 것. 이런 ‘빛의 궁핍’은 전등과 만나 독특한 톤을 형성한다. 샤오스의 집 식탁(사진 4)이나 ‘소공원파’의 리더 허니(임홍명)의 은신처(사진 5)는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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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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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 땐 한정된 빛의 사용이 각 인물들에게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샤오쓰는 빛이 밀폐된 침실에서 손전등을 켜고 일기를 쓴다(사진 6). 아버지의 공간인 라디오 앞(사진 7), 어머니(금연령)의 공간인 책상(사진 8) 등도 마찬가지. 빛의 제약을 통해 공간을 캐릭터의 일부로 만드는 방식은 감독의 전작인 ‘공포분자’(1986, 사진 9)나 ‘청매죽마’(1985, 사진 10)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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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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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17파’의 아지트는 상습적으로 정전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촛불이 중요한 광원으로 사용된다(사진 11). 여기서 정전은 이후 거대한 폭력의 무대가 되는데, ‘217파’의 보스 샨동(알렉스 양)은 허니를 죽인 후 복수를 당한다. 이때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살육은 손전등을 통해 가끔씩 등장하는 한줄기 빛과 결합되어 극적인 효과를 강화한다(사진 12). 살인이라는 범죄와 칠흑 같은 어두움이다.

이 영화는 ‘어두움-범죄’라는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데, 어둠 속에서 던져진 농구공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밝은 곳에 있는 샤오쓰와 캣(왕치찬)과 비행기(로렌스 커) 앞에(사진 13) 누군가 농구공을 던지고(사진 14), 샤오쓰가 그것을 맞받아 던지면서 싸움은 일어난다. 슬라이(첸홍위)가 샨동과 모의하는 곳도 어두운 영화관이다(사진15).

M241_‘고령가 소년 살인사건’_김형석 칼럼

M241_‘고령가 소년 살인사건’_김형석 칼럼

어쩌면 샤오쓰가 항상 손전등을 가지고 다니는 건, 그를 유혹하는 어두움을 쫓기 위한 행동이다(게다가 샤오쓰는 점점 시력이 안 좋아지고 있다). 그 손전등은 학교 근처 영화 촬영장에서 훔친 것인데, 마치 부적처럼 샤오쓰와 함께 한다. 하지만 샤오쓰는 영화 후반부에 손전등을 다시 촬영소에 돌려주는데(사진 16), 이후 샤오쓰는 밤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빛을 버리고 어두움을 선택해 버린 소년의 이야기 ‘고령가’. 엘비스의 노래 ‘Are You Lonesome Tonight(오늘밤 외롭지 않나요)’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A Brighter Summer Day(더 밝은 여름 날)’라는 건, 그래서 더욱 역설적이고 마음 아프다.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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