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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떠난 정의화 "김기춘이 '친박이냐 친이냐' 묻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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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박입니까 친이입니까?”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2014년 봄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들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에서 국회의장 후보를 뽑는 경선을 앞두고 청와대의 중립을 부탁하려고 만난 자리였다. 상대 후보로 친박계 황우여 의원이 나와 내심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 비서실장이 노골적으로 ‘신분 확인’을 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는 “'친박도 아니고, 친이도 아니고, 친대다. 친대한민국'이라고 답했다”고 회고했다.

"김기춘 비서실장 나에게 '친박이냐 친이냐' 묻길래 '친대'라고 대답" #"진박(眞朴)들, 대통령 뜻 앞세워 국회의장 압박 행태 심해" #"많은 지지자들 대선에선 안철수 찍었다. PK 표심 갈 곳 못 찾아" #“지방선거만 보고 보수 통합했다간 민심 되찾지 못한다" #"이원집정부제는 국회의원을 견제하고 특권 뺏는 것"

대선 후 정치인생을 마무리하고 부산에서 본업인 의사(봉생의료원장)로 돌아간 정 전 의장을 1일 만났다.
최근 회고록 『아름다운 복수』을 출간한 그는 “이젠 현실 정치에 대해 잘 모른다”며 말을 아꼈지만 보수정당의 ‘몰락’에 대해 묻자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정 전 의장은 “내가 사랑하고 아꼈던 그 정당이 맞나 싶다”며 “19대 국회 소위 ‘진박(眞朴)’들의 행태가 보수정당을 회생불능으로 끌고 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보수가 살아나려면 통합에 앞서 처절한 반성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방선거만 바라보고 ‘땜질’만 했다간 완전히 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1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탄핵 1주년에 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오종택 기자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1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탄핵 1주년에 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오종택 기자

-여당 출신 국회의장이면서 박근혜 정부와 적지 않은 갈등을 겪었다.
“2015년 12월 15일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이 ‘대통령 말씀을 전하겠다’며 찾아왔다. ‘경제활성화법, 노동법 등을 직권상정해 주지 않으면 선거법 통과도 없다’는 것이다. 바로 넉 달 뒤 총선을 치러야하는데 이게 말이나 되나. 내가 (현 수석의) 부산 정치 선배인데 예의도 안 지키고 거만하게 앉아서 강압적으로 말하는데 충격 받았다. ‘이런 일이 언론에 알려지면 안 되겠다’ 싶어서 쉬쉬했는데, 오히려 현 수석이 청와대 기자들에게 ‘국회의장 만나고 왔다’고 이야기했더라. 당시 소위 ‘진박(眞朴)’ 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앞뒤를 못 가렸다.”

-현 수석이 그럴 수 있었던 건 청와대의 기류가 반영된 것 아니었을까.
“청와대와 여당의 교감이 있었는데 그대로 안 따라주니까 반발심이 있었다. 한 번은 조모 의원이 ‘국회선진화법 개정안을 왜 직권상정 안 하느냐’고 다그쳤다. 그래서 ‘국회선진화법을 만든 것이 여러분인데 이래도 되냐’고 화를 냈다. 그러니까 원내대책회의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이 국민의당으로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데 오보이길 바란다’고 말하더라.”

-국회의장 시절 박 전 대통령 비판을 많이 했다.
“나는 천성이 강직한 편이다. 계파 정치도 싫어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나를 ‘세종시특위 위원장’에 임명해서 청와대에서 한 시간 면담하고 대통령의 뜻도 전달받았지만 다른 결론을 내렸다. 나는 ‘정의화’에 정은 바를 정(正)으로도 생각하며 산다. ‘불(不)의화’로 성을 바꾸지 않는 한 소신을 꺾을 순 없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1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탄핵 1주년에 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오종택 기자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1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탄핵 1주년에 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오종택 기자

-지금 정치권에서는 내년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을 추진하자고 한다. 어떤 방향으로 개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주장하는 개헌 방향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같은 이원집정부제다. 중대선거구제로 바꾸고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포함해야 한다. 대통령이 모든 걸 가져 가고,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현재의 승자독식구조로는 계속 실패한 대통령을 만들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다수는 대통령 중심제를 선호한다.
“국민들은 이원집정부제를 한다고 하면, ‘아니 저 놈들에게 장차관도 맡겨?’라며 반발한다. 국민들이 국회의원을 불신하는 건 각종 일탈 행위와 특권 때문이다. 이원집정부제에서 국회의원들이 국무총리, 장관 등을 하면 오히려 국민들이 정치인들을 철저하게 감시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원집정부제는 국회의원이 권력과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국민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1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탄핵 1주년에 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오종택 기자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1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탄핵 1주년에 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오종택 기자

-지금 보수 정당이 분열되어 지리멸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퇴골에 골수염이 생기면 통증도 있고 열도 난다. 찜질도 하고 약도 먹는다. 더 발전하면 피부가 벌그레해지고 고름이 밖으로 나온다. 지난 총선이 바로 이 상태였다. 과거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부터 조금씩 진전된 염증이 이회창·이명박· 박근혜 시대를 거치면서 악화되다가 지난해 탄핵 국면에서 터진 거다. 이제는 살을 째고 들어가서 고름을 다 긁어내서 치료해야 한다. 안 되면 다리를 잘라내고 의족을 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보수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지방선거를 대비해 보수통합으로 문재인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제가 잘 아는 부산의 한 지지자가 지난 대선 때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찍었다고 한다. 국민의당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갈 곳을 못 찾은 것이다. 지방선거만 바라볼 때가 아니다. 무너진 보수를 재건하려면 원인 분석과 반성,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면 내년 지방선거는 설령 패배해 폐족이 되더라도 국민들의 마음을 얻고 다시 회생할 수 있다.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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