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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서 개성있는 나로 … 소녀의 욕망은 진화한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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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호 25면

사토나카 마치코 ‘천상의 무지개’(1983~2015)

사토나카 마치코 ‘천상의 무지개’(1983~2015)

소녀들의 이름은 애니, 클라라, 로랄린드 등이었다. 금발의 곱슬 머리에 큰 리본을 달았고, 뒤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1950~60년대 일본에서 출간된 소녀 만화의 상당수는 유럽이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사랑과 눈물의 드라마’였다. 전쟁의 흔적으로 황폐했던 시대, 우아하고 세련된 서구 문화를 동경하던 일본 소녀들의 열망이 담겼다.

한국만화박물관 ‘일본 소녀만화의 세계’ 전 가보니

‘소녀만화(少女漫画).’ 소녀나 과거에 소녀였던 성인 여성의 감성을 건드리는 여성 취향 만화를 총칭한다. 일본에서 소녀 만화는 1950년대 처음 등장해 60~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주인공의 캐릭터도, 만화의 주제도 진화했다. 한국의 ‘순정만화’에도 영향을 준 일본 소녀만화의 역사를 살피는 전시가 경기도 부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사장 김동화)과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소장 야마사키 히로키)가 공동으로 준비한 ‘일본 소녀 만화의 세계: 소녀들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전(11월 23일~2018년 2월 25일)이다.

데뷔 초기 순정만화로 인기를 누렸던 『은하철도 999』의 마쓰모토 레이지를 비롯해 『유리가면』의 미우치 스즈에, 『서양골동양과자점』의 요시나가 후미 등 국내 만화 팬들에게도 친숙한 일본 만화가 12명의 대표작을 선보이는 자리에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만화책 350여 권이 쌓여 있다. 전시에 소개된 작가들의 대표작을 직접 읽어볼 수 있는 코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도쿠 마사미(59) 캘리포니아 주립대 치코(CSU hico) 캠퍼스 미술교육과 교수가 쌓인 만화책을 보며 감탄한다. “아주 좋은 아이디어에요. 그동안 미국과 일본 여러 도시에서 전시를 했는데, 관람객들이 직접 만화를 읽을 수 없어 안타까웠거든요. 이 전시장에선 몇 시간도 보낼 수 있겠네요.”

모퉁이를 돌면 아기 사슴을 품에 안은 금발의 소녀가 관람객을 맞는다. ‘철이’와 ‘메텔’의 아버지인 마쓰모토 레이지가 1968년 발표한 소녀만화 『클라라의 호수』 주인공 클라라다. 『리본의 기사』를 그린 데쓰카 오사무를 비롯해 일본 소녀만화 초창기에는 남자 작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뤘다. ‘현대 소녀만화의 여명기’로 불리는 이 시대에 인기를 끈 작품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주인공 소녀가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사랑과 행복을 쟁취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전시에는 『성 로잘린드』와 『유리의 성』등을 그린 와타나베 마사코, 『별의 하프』『은의 꽃잎』 등으로 인기를 모은 미즈노 히데코, 『미친 사랑』 『악녀 성서』 등으로 알려진 마키 미야코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다. 이들은 얼굴의 반을 채우는 큰 눈, 꽃과 리본의 조화 등 소녀만화의 ‘전형’을 만든 작가들이기도 하다. 마키 미야코 작가는 전시 기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망적으로 가난한 시대였기 때문에 만화에선 꿈과 같은 세상을 그리고 싶었어요. 실제로 소녀들이 입어봤으면 하는 옷을 디자인했죠. 현실에서처럼 누더기를 기운 옷을 입은 캐릭터는 한번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와타나베 마사코 ‘성 로잘린드’(1973)

와타나베 마사코 ‘성 로잘린드’(1973)

미우치 스즈에 ‘아마테라스’(1987~2001)

미우치 스즈에 ‘아마테라스’(1987~2001)

뒤이은 ‘소녀만화의 발달기’(1970~80년대)에는 스타 작가들이 속속 등장하며 재능을 화려하게 꽃 피웠다. 60년대 창간된 ‘주간 소녀프렌드’와 ‘주간 마가렛’ 등 소녀만화 잡지가 궤도에 오르며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캔디』, 미우치 스즈에의 『유리가면』 역사적인 명작들이 속속 발표된다. 당시 활약했던 쇼와 24년(1949년)생 소녀만화가 집단을 ‘꽃의 24년조(花の24年組)’라고 부르는 데, 이를 대표하는 작가가 『포의 일족』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를 그린 하기오 모토다. 이번 전시에는 하기오 모토의 대표작은 물론이고 『에리스의 처녀들』을 그린 사토나카 마치코와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의 구라모치 후사코, 『바나나 피쉬』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요시다 아키미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 소녀만화의 주제는 사랑 이야기를 넘어 시대극과 모험물, SF 등으로 장르가 무한 확장된다. 도쿠 교수에 따르면 “여성 주인공의 자아 실현이 주요 주제가 되고, 멋진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하드보일드한 이야기가 소녀들의 큰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기”다.

미우치 스즈에 ‘유리가면’(1976~)

미우치 스즈에 ‘유리가면’(1976~)

특히 이 시대 작가들은 직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소년만화의 컷 배분 방식과는 다른 과감한 화면 분할과 말풍선의 자유로운 활용 등으로 소녀만화 특유의 미학을 만들어낸다.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그림은 『유리가면』의 두 주인공 마야와 아유미가 홍천녀 역할을 두고 싸우는 장면. 삐죽삐죽한 말풍선으로 소녀들의 날카로운 감정을 시각화하고, 사선으로 나눈 칸을 점점 작아지게 배치해, 장기간 이어지는 갈등을 표현했다.

90년대 이후 작품들은 소년만화와 소녀만화의 경계를 넘어선다. 3세대 ‘소녀만화의 새로운 방향성’ 섹션에 소개되는 작가들은 남성 팬도 다수 확보하고 있다. 『음양사』의 오카노 레이코, 『백귀야행』의 이마 이치코, 『서양골동양과자점』의 요시나가 후미다. 이들은 잡지 공모전이 아니라 아마추어들이 자유롭게 작품을 선보이는 코믹마켓을 통해 이름을 알리면서 데뷔한 작가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들은 뚜렷한 개성과 자기만의 세계를 가졌다. 만화의 소재도 일본 신화나 전설을 활용하거나 남성끼리의 사랑을 그린 ‘BL(Boy’s Love)물’까지 다양하다.

‘일본 소녀만화의 세계’는 2005년부터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세계 순회 전시다. 미국에서 만화의 미학과 아동 인지 심리를 연구하고 있는 도쿠 교수가 자신이 사랑하는 일본 소녀만화를 미국인들에게 소개하고자 기획했고,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지원을 받아 북미와 아시아에서 50회 이상 전시를 이어갔다. 한국전 이후에는 남미 지역으로 넘어간다. 도쿠 교수는 “일본 소녀만화의 장르적 우수성과 변화하는 일본 여성의 역할을 보여주고자 했다”며 “특히 일본 만화에 친숙한 한국 관객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무료. 문의 032-310-3090~1.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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