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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정치Q] 유인태 의원 '사형의 추억'과 천정배 법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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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러한 급물결 뒤에는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이 있다. 그는 의원 175명의 서명을 받아 지난해 말 폐지법안을 발의했다. '천정배 의원'도 서명했다. 유 의원에겐 사형의 추억이 있다. 천 장관도 이를 잘 알고 있다.

1974년 4월 학생운동권은 유신정권에 대규모로 저항했다. 민청학련 사건이다. 유인태.이철.김지하 등 7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울러 이들을 조종하고 '인민혁명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로 수십 명이 구속됐다. 민청학련 관련자는 감형.석방돼 유 의원 등은 교수형을 면했다. 그러나 인혁당재건위 핵심 8인은 75년 4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18시간 만에 처형됐다. 유 의원은 이들과 함께 서대문 구치소에 있었다. 그중에는 유 의원이 형님으로 불렀던 여정남씨와 경기여고 교사 김용원씨가 있었다. 여씨는 경북대 학생운동의 리더였다. 유 의원의 회고.

"대법 판결이 있는 날 운동장에서 김용원씨를 만났어요. '오전에 수갑을 더 풀기 어려운 걸로 바꿨어. 드디어 우릴 죽일 모양'이라고 하더군요."

유 의원은 '설마' 했다. 그런데 다음날 이례적으로 기상 시간이 늦춰졌다고 한다. "기분이 이상해 감방 창문으로 달려가니 여 선배가 끌려가고 있었어요. 꽤 덩치가 컸는데 힘도 쓰지 않고 그냥 조용히 걸어갔어요. 그게 마지막이에요."

73년 12월 여씨와 유인태.이상수(노동부 장관).이철(철도공사 사장) 등은 서울 안국동 막걸리집에서 시작해 유씨 집에까지 이르면서 대취한 적이 있다. 유인태.이철은 붙잡히기 전 여씨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런 여씨가 그렇게 죽어간 것이다. 지난해 12월 국정원 과거사위는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고 발표했다. 법원은 재심을 결정했다. 유 의원은 "사형제가 없다면 그들은 지금 재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국회의원 개인의 경험은 이처럼 입법에 영향이 크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돼서는 안 된다. 사형제는 찬성도 많다. 추억이 개인을 뛰어넘어 공동체의 공감대가 되려면 종합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김진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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