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용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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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저 대학교수들이 우리의 지시인들이라니 한심하다.』
어느 종교인이 요즘 민화위에서 한 말이다.그에 앞서 어떤 인사는 종교계 지도자들이 「선지음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한 발언도 했다.
우리 사회에선 한 시대가 바꿜때면 예외없이 「어용」시비가 따랐다. 60년대 4·19직후에 그랬고 80년대 유신이 끝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80년 5월 고려대 학원문제위원회는 어용교수를 5개유형으로 분류한 일도 있었다. ①요모조모로 유신에 협력한 「유신교수」 ②민주학생탄압을 도운 「경찰어용교수」③반민중학의풍토를 조성한 「매판교수」 ④재단에 기생하는 「재단어용교수」 ⑤연구활동이 부진한 「무능교수」.
제5공화국형 어용은 아직 이렇다할 기준을 제시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최근 주위의 설왕설래를 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이마에 어용의 딱지를 붙여야 할 것 같다.
길거리에서 최루탄 냄새를 맡지 않거나 덜 맡은 사람, 대학의 보직교수나 시험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나무란 교수, 하하와 비비를 함께한 사람, 특정지역의 사투리를 쓰는 사람, 특정인의 이름에 존칭을 붙이는 사람,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사람, 신문에 기명으로 글쓰기를 좋아한 사람….
이렇게 따지자면 차라리 어용 아닌 사람을 골라내는 편이 마빠를지도 모른다. 「어용」이란 말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민감하게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가령 「카터」정권에 참여한「브레진스키」는 콜럼비아대 교수로 돌아갔지만 「어용」소리를 듣지 않는다. 「드골」의 독재에 참여한「앙드레·말로」도 어용작가라는 평판에 밀려 혼신의 어려움을 당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만년 해바라기형 「어용」인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용시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어용의 온상이다. 소신껏 권력에 협력하고도 어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역시 권력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 국민이 선택한 도덕적 기반위에 있는 정권에 참여하는 것을 어용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무리다. 민주주의의 강점은 도덕성에 있으며 그 도덕성은 참여의 자유까지도 보장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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