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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류경식당 집단 탈주’ 공작 정보도 들여다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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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국정원 메인 서버 까기의 불법성 탐구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없었던 일

서훈 원장이 발족시킨 개혁발전위 #밑에 검사가 지휘하는 ‘적폐TF’ 둬 #“류경 탈주극 큰 문제 없어” 덮어 #“덮었어도 판도라 상자는 열렸다 #북·중 협조자들 생명 위협 느낄 것 #국내외 대북 첩보망은 와해됐다” #정보·공작기관 출신들 위기감 토로 #국정원법, 비밀 공개 자체를 금지 #국가기밀 사법 용도로 써도 위법 #외국 기관 한국과 정보 교환 꺼려 #쇠뿔 고치려다 소 죽이지 말아야

지금 한국에선 세계 정보기관 사상 유례없는 ‘국정원 메인 서버 들여다보기’가 진행되고 있다. 다섯 달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없었던 일이다. 서버를 들춰 보는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정책에 따라 발족한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위원들과 그 산하의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 팀원들이다. 집단적인 ‘국가 기밀 들여다보기’는 활동의 목표가 국가 정보 행위와 관계없는 사법처리에 맞춰져 있고, 비밀 취급 훈련과 경험이 없는 민간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법성 시비가 붙고 있다.

개혁발전위원은 10여 명으로 위원장은 정해구(62) 성공회대 교수, 대변인은 장유식(53) 변호사다. 정해구 교수는 “북한에서는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 소련군의 후원에 힘입어 순조롭게 진행됐고, 남한에서는 이러한 혁명이 미 군정의 반혁명 정책에 의해 좌절됐다”는 글을 쓴 주인공이고, 장유식 변호사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 온 참여연대 출신 시민운동가다.

장 대변인은 “개혁위원들은 적폐청산 TF팀이 제공하는 보고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메인 서버의 내용을 접하고 있을 뿐이다. 메인 서버를 직접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적폐청산 TF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6월 19일 개혁위 출범 때 나온 보도자료(국정원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엔 “적폐청산 TF는 조사 결과에 대해 개혁위에 보고한다”고 적시돼 있다. 개혁위가 적폐청산 TF의 보고를 받는 상부기구다.

적폐청산 TF 팀원은 30명 미만이다. 대부분 국정원 내부 직원이다. TF팀의 지휘자는 검찰에서 파견된 조남관(52) 감찰실장. 또 다른 3명의 검사가 그를 돕고 있다. 과거 정권에서 ‘국정원 현안 TF’의 지휘자였던 장호중 전 감찰실장을 포함한 3명의 파견 검사들이 보름 전 줄줄이 구속됐다. 그중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정원법과 보안업무규정 위배

국정원 메인 서버 들여다보기 진행 과정은

국정원 메인 서버 들여다보기 진행 과정은

메인 서버 들여다보기가 불법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법령은 크게 두 가지다. ① 국가 기밀은 다른 국가 또는 집단에 대하여 비밀로 할 사실·물건 또는 지식으로 분류된 것으로 한정된 인원만이 알 수 있도록 허용된다(국정원법 13조). ② 비밀은 해당 등급의 비밀 취급(비취) 인가를 받은 자로서 그 비밀과 업무상 직접 관계가 있는 자에 한하여 열람할 수 있다(대통령령 보안업무규정 23조1호). 이 밖에 ‘비밀 취급 비인가자에게 비밀을 취급하게 할 때에는 미리 국정원의 보안조치를 받아야 한다(보안업무규정 23조2호)’는 조항도 있다. 개혁위원들은 메인 서버 들여다보기를 두 달쯤 한 뒤에야 비로소 비취 인가를 받은 탓에 국회에서 위법 논란이 일었다.

①에 대해 살펴보자. 개혁위원과 팀원들은 ‘한정된 인원만이 알 수 있도록 허용된’ 국가 기밀을 검찰이나 국내외 기관·일반인들이 모두 알도록 공개한 불법성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검찰이 형사소송법 절차를 따라 국정원 직원들로부터 확보한 진술을 사법처리 과정에서 공개하는 것과 법적 성질이 다르다. 그 자체가 국가 기밀인 국정원 메인 서버에서 임의의 키워드들로 추출한 관련 내용을 끄집어내 대중에 공개하는 행위는 설사 비취 인가를 받은 자라 해도 국정원법에 허용돼 있지 않다. 비취 인가자는 열람만 가능하다.

물론 소속 기관장, 즉 국정원장의 승인이 있을 경우 비밀을 공개할 수 있다는 보안업무규정 24조가 빠져나갈 구멍이긴 하다. 그러나 하위법인 보안규정이 상위법인 국정원법을 거스를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다.

합법·비합법 경계선의 정보 활동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서훈 국정원장의 비밀 공개 승인이 적폐청산 조치일 수 있지만 정치 보복이라는 시각도 상당하다는 점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정치세력에 의해 5년 뒤 정권이 교체된다면 서 원장은 국정원법 9조(정치 관여 금지)나 11조(직권남용 금지)를 위반했다는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합법과 비합법, 정치와 비정치의 영역을 넘나들 수밖에 없는 국가 정보 행위의 성질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1970년대 미국에서 과거 중앙정보국(CIA)의 불법·반인권 활동을 조사했던 의회의 처치위원회(Church committee)는 사람을 처벌하지 않고 제도 개선에 집중했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는 국정원 조사 방식은 정반대다. 조사 주체를 국회가 아니라 정권과 코드가 맞는 민간 집단이 맡았다. 제도 변화보다 단죄에 치중하고 있으니 보복의 악순환이 우려되는 건 사실이다.

②는 어떤가. 국정원의 비밀이나 공작 정보는 국가 정보기관의 존재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스파이 세계의 불문율이다. 이 불문율이 깨지면 어떤 정보기관이나 공작기관도 비밀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류경식당 북한 종업원 13명 탈출

TF팀은 최근 적폐청산 작업의 일환이라며 지난해 4월 중국 저장성의 류경식당에서 일하다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입국한 북한 종업원 13명 탈출 사건에 관한 비밀 문건들을 메인 서버에서 꺼내 본 것으로 알려졌다. 류경식당 집단 탈주 드라마는 통상 북한 주민의 자발적인 자유 세계 선택을 한국 정부가 도와 성공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이해되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한국에 의한 강제 납치 사건이라고 주장해 왔다. TF팀은 개혁위의 요청에 따라 ‘류경식당’ 등 키워드를 국정원의 메인 서버 전산 직원에게 제시하고 그들이 관련된 첩보·정보·공작 기록들을 모두 뽑게 한 것으로 전해졌다.

개혁위와 적폐청산 TF가 류경식당 집단 탈주 때 국정원이 어느 정도 개입했으며, 납치 행동을 저질렀는지 등을 살펴보려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류경식당 사건에서 국정원의 문제나 불법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정보 관계자는 “류경식당 자료들을 확인해 보니 큰 문제가 없어 개혁위가 그냥 덮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가 만난 다수의 국정원 정보기관·공작기관 출신 인사들은 “덮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류경식당 관련 기밀이 통째로 여러 사람의 손을 탄 것 자체가 정보 세계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류경식당 탈주극은 한국과 북한·중국 간 주권·외교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국제문제다. 전 세계 정보기관이 주시하고 관련국 기관들의 정보·공작 역량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스파이 사건이다. 탈주 과정에 북한 내 조력자, 중국 내 협조자가 있었다면 이들의 신변이 드러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첩보망이 와해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극도로 민감한 해외 공작 사건의 내막을 어떻게 교수나 검사·변호사·시민운동가 같은 민간 개혁위원들이 볼 수 있느냐는 비판이었다.

개혁위 보도자료가 위법성 증거?

국정원에서 정보를 종합 관리하던 인사는 “메인 서버의 기밀 문건엔 정보 작성자, 국내외 소스들, 공작 참여자 등이 기재돼 있다. TF팀이 개혁위원들에게 정보를 선별해 제공했다 해도 한국 정보기관의 신뢰성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추락했다”고 한탄했다.

중국에서 근무했던 전 공작관은 “메인 서버를 깠다는 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얘기다. 국제 정보계에선 각국 요원들이 고도의 기밀 유지를 전제로 정보를 주고받는 게 일상화됐다. 앞으로 어떤 나라 정보기관이 한국과 정보를 거래하려 하겠는가”라고 했다.

보안업무규정엔 ‘그 비밀과 업무상 직접 관계가 있는 자’만 비밀을 열람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런데 TF 팀원과 개혁위원들은 ‘그 비밀과 업무상 직접 관계가 없는’ 적폐청산이나 사법처리 용도로 비밀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10월 23일자 보도자료를 보자.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이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RCS(Remote control system)라는 해킹 장치를 통해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의혹을 조사했으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개혁위는 사법처리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 보호받아야 할 비밀 정보를 세상에 공개했다. 의심 많은 언론과 여론을 설득하려니 불가피했을 것이다.

내곡동 향해 쏟아지는 탄식들

“RCS는 2012년 1월과 7월 각각 10회씩 총 20회선을 구매했다” “RCS 서버를 검증한 결과 테러, 국제 범죄들과 연결된 총 213명의 퍼스널 컴퓨터와 휴대전화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나타났다” “RCS가 사용된 내국인은 4명으로 해외 거주 북한 연계 혐의자 2명, 해외 체류 중인 테러 연계 혐의자 1명, 국내 거주 중인 국제범죄 연계 혐의자가 1명”이라는 식이다.

암호 자재는 ‘누설되는 경우 국가 안전보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2급 비밀’이나 그 이상으로 분류된다. 1급이나 2급 비밀에 해당하는 RCS의 존재와 사용 명세를 이토록 세세하게 공개했으니 보도자료가 국정원법을 위반한 증거가 될 것이다. 개혁위는 국정원의 암호 자재와 운용 역량을 북한 정권을 포함한 세계 정보기관과 대한민국 적대 세력들에 광고한 셈이다. 난센스도 이런 난센스가 없다. 이 모든 것이 국가 기밀을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적폐청산, 사법처리 용도로 쓰면서 벌어진 일이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국정원 울타리에서 국가 정보 파괴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어느 나라든 국가 정보기관의 메인 서버엔 ‘수치스러운 비밀 정보’가 포함돼 있다. 그 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투명하고 당당한 민주국가의 도리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없앨 수는 없다. 국가 생존을 위해 대통령 책임 아래 누군가는 해야 하는 수치스러운 비밀 작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민주국가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국정원의 불법 행동을 바로잡는 개혁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국정원의 메인 서버 공개가 국정원을 죽였다는 탄식이 내곡동을 향해 쏟아지고 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