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없는 회의 박보균<정치부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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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위원장을 뽑기 위해 l6일 열린 민화위 (민주화합추진위)의 첫 회의는 종래 유사한 회의에서는 볼 수 없던 몇가지 인상적인 장면을 남겼다.
80,90대 원로들이 앞줄에 앉고 노태우 대통령당선자와 김용철 대법원장·김정렬 국무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개회식부터 근래 정치권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각계의 원로·중진들이 이처럼 한자리에 모인 것도 드문 일인데다 19세기에 태어난 이관구 임시의장 (92) 이 사회봉을 두드리고 80대 원로들이 천천히 박수를 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회의가 위원장 선출건에 들어가자 더욱 색다른 분위기가 되기 시작했다. 종래의 이 같은 회의라면 으례 주최측(준비위)이 위원장 후보를 내정하고 위원들에게도 사전에 사발통문을·돌려 회의는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돼 내정된 후보를 일사천리로 선출하기가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준비위측은 민화위가 편견 없는 「고견」을 노 당선자에게 건의하라는 취지에서 일체의 회의 진행 시나리오를 사전에 짜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심 누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위원장 선출을 철저히 의원들의 호선에 맡겼다.
이 임시의장이 선출방법을 묻자 평소 민정당과 내왕이 있던 한 위원은 『임시의장과 준비위가 합의해 천거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무슨 소리냐』는 반대의견이 빗발쳤다. 『최연장자인 임시의장이 맡는게 관례다』, 『공천심사위부터 구성하자』, 『준비위의 의견을 들어보자』 ,『우리가 독자성을 발휘하려면 준비위의 의견은 들을 필요가 없다』….
각계각층에서 모인 원로급 위원들은 자질구레한 용어에서부터 저마다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회의는 엿가락처럼 늘어져 시간을 끌다가 가까스로 공천위를 구성해 결국 이 임시의장을 위원장에 선출했다.
회의를 마친 후 위원들은 모두 『이제 짜고 하는 회의는 안 한다』며 어용콤플렉스를 물리친 자신들의 행위가 자못 대견한듯한 표정이었다.
모처럼 보는 각본 없는 회의, 결과가 예정돼 있지 않은 회의는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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