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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파드되를 출 시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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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호 16면

 황혜민(왼쪽)과 엄재용(오른쪽)

황혜민(왼쪽)과 엄재용(오른쪽)

유니버설발레단의 간판스타 황혜민(39)·엄재용(38) 부부가 동반 은퇴한다. 지난 15년간 1000회가 넘는 공연에서 환상의 호흡을 보여줬던 커플이다. 마고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예프처럼 세계 발레사에 전설적인 파트너십이 간혹 있지만, 부부가 최고의 자리에서 ‘영원한 파트너’로 함께 은퇴하는 건 유례없는 일이다. 이들이 선택한 고별 무대는 드라마발레 ‘오네긴’(11월 24~2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다른 무대에서 활약할 엄재용과 달리 황혜민은 ‘완벽한 은퇴’를 선언했기에, 부부가 함께 춤추는 무대는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유니버설발레단 동반 은퇴하는 황혜민·엄재용

24일과 26일 두 번의 공연을 앞둔 이들과 중앙SUNDAY S매거진이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작가 박귀섭의 제안으로 두 사람의 온몸에 이들의 무용인생에서 상징적인 글과 그림들도 함께 새겼다. 평생 몸으로 그림을 그려왔던 ‘몸의 기억’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이었다.


재용은 ‘Mr.JY’라고 적어 달라며 혜민에게 손등을 내밀었다. 혜민의 팔엔 ‘Mrs. HM’이라 썼고 둘의 팔을 포개 ‘2012.8.21.Married’까지 적었다.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2003년 5월 6일’, 발레단 재직 기간인 ‘2000~2017’ ‘2002~2017’ 등 의미있는 숫자들, ‘나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모든 건 때가 있다’는 은퇴 관련 의미의 타투도 새겼다.

온몸에 기록을 입히고 촬영을 위한 둘의 파드되 동작 을 보고있자니, 15년간 함께 춰 온 파드되를 졸업한다는 의미가 확 다가와 맘이 짠해졌다. 정작 본인들은 의연했다. “그런 생각은 안해봤는데…. 파드되뿐 아니라 발레단 떠나는 모든 게 아쉽죠.”(황) “아쉬움도 있지만 충분히 했어요. 남자들은 너무 힘든 것도 있구요.(웃음)”(엄)

동반은퇴에 충격 받아 ‘발레덕후’를 은퇴하겠다는 팬도 있는 데요.
엄: 좀 아쉬울 때 딱 좋은 모습으로 최고의 마지막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세월은 누구도 이길 수 없으니, 팬들이 실망하시기 전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야죠.

황: 한 팬분이 ‘영원히 무대 위의 당신들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을 주셨는데 정말 감동이었죠. 저는 제 시대를 가졌고 하고 싶은 무대를 다 했기에 미련은 없어요. 50대에 컴백한 알렉산드라 페리가 물론 위대하지만 저는 그녀의 옛모습을 기억하고 싶더라구요.  

발레단이 집 같고 단장님이 부모님 같다고 했는데,
홀로서기가 외롭지 않나요.
엄: 좀 어색하죠. 새로운 사람 만나고 새로운 자극 경험할 수 있으니까 재미도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발레단에 돌아오면 제일 편하죠. 17년 동안 있던 곳인데요.

황: 지금은 마냥 쉬고 싶고 인생을 즐길 계획인데, 그런 마음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 월요일 되면 무심코 ‘발레단 가야지’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단장님의 1대1 렛슨 평생 기억할 것”

고 2때 혜민을 처음 본 재용은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당시엔 “잠시 썸을 탔을 뿐”(엄) 적극 다가가지 못하다가 발레단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썸이 아니라 재용이 저를 쫓아다녔죠. 귀여운 후배가 쫓아다니는구나 싶어 좀 즐겼죠.(웃음) 입단하자마자 파리 공연을 같이 갔을 때부터 남자로 보인 것 같아요. 그때 제가 단장님이랑 한 방을 썼는데, 공연 끝나고 같이 어울리다 늦게 들어갔더니 단장님이 저를 엄청 걱정하고 계셔서 죄송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황)

혜민에게 문훈숙 단장은 전막발레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2003년 ‘지젤’로 데뷔할 때 문 단장에게 1대1 렛슨을 받은 과정을 잊을 수 없단다. “왕이라는 중국 무용수와 처음 데뷔했는데, 연습과정이 더 기억나요. 단장님이 저를 붙잡고 드라마를 다 가르쳐주셨거든요. 특히 남자 무용수를 마주볼 때 남자로 보지 말고 2초 동안 눈동자 색깔을 보라고 하셨는데, 그 2초를 지금껏 잊지 않았죠.”(황)

2004년 ‘라바야데르’때 전막 첫 파트너가 됐는데,
서로 눈동자 색깔을 봤나요.
황: 이미 연인사이라 그럴 필요 없었어요(웃음). 큰 무대고 어려운 작품이었는데, 좋아하는 사람인데다 파드되를 엄청 잘하는 재용이랑 하게 되어 좋았어요.

엄: 저는 단장님과 파트너할 때도 똑바로 쳐다봤었는데요(웃음). ‘라바야데르’가 처음이라 정신없는 와중에 혜민과 하게 되어 편안하게 했던 것 같아요.  

15년 동안 거의 매일 함께였던 두 사람은 “늘 같이여서 참 좋을 때도, 참 안 좋을때도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때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은퇴 직후 두 사람은 며칠간 각자의 시간을 갖는단다. 혜민이 훌쩍 여행을 떠나기로 하면서다. “오네긴 끝나자마자 친구 넷이서 홍콩 여행 계획을 다 세워놨다”며 들뜬 표정이다. “애 엄마고 회사원인 친구들인데, 제 은퇴를 축하해야 한대요. 괜히 제 핑계대고 자기들이 숨 쉬고 싶어서 가는 것 같아요.”(혜민) “저도 배낭여행이 꿈이거든요. 혜민이 따로 간다니 저는 혼자 맛집기행이라도 가야죠.(웃음)”

황혜민(왼쪽)과 엄재용(오른쪽)

황혜민(왼쪽)과 엄재용(오른쪽)

“마지막 무대는 원없이 즐길 터”

이들이 은퇴작으로 선택한 ‘오네긴’은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의 은퇴작이기도 했다. 테크닉보다 감성적인 연기가 필요한 드라마발레라 성숙한 무용수들에게 잘 어울리기에 부부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오네긴’은 마치 혜민을 위해 만든 작품이란 생각이 들 정도”라는 문훈숙 단장도 이들의 바램을 존중해 2013년 이후 4년 만에 재공연을 결정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많이 보여줄 수 있는 게 연기적인 부분이니까요. ‘오네긴’은 군무도 필요하지만 주역 두 명과 솔리스트 두 명이 이끌어가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작품이거든요. 테크닉보다 감성으로 감동적인 무대를 남기고 싶어요.”(엄)

“차이콥스키 음악과 안무, 드라마가 정말 잘 조합된 마스터피스라 무용수라면 누구나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이죠. 마지막 오열 장면을 제일 좋아해요. 10~15초 동안 다 쏟아내야 하는데, 음악만 들어도 저절로 눈물이 나요. 초연 때부터 그랬는데, 이번에도 원없이 울겠죠.”(황)

타고난 왕자 이미지인 재용에게 나쁜 남자 캐릭터 소화가 어렵지 않냐고 물으니 “내 속에 나쁜 남자가 있는지 어렵지 않다”며 웃는다. “얼굴이 선해 보여서 더 나쁘게 해도 된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어요. 오늘도 장난삼아 애들한테 막 ‘야 저리 비겨, 조용히 안해?’ 이러니까 재밌던데요.(웃음)”(엄)

이들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오네긴’을 “최고의 감동으로 완성하고 싶지만” 욕심은 부리지 않겠다고 했다.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라 늘 최선을 다했거든요. 몇 달전엔 오만 생각 다 했지만 지금은 내려놓고 매일매일 맞춰 가는 중이죠. 마지막 공연에 욕심까지 더해지면 큰일 날 것 같아서요.”(엄)

“저는 즐기고 싶어요. 늘 생각이 많아 복잡했는데, 마지막이니까 원없이 즐기면서 하고 싶네요.”(황)

혜민은 아직 인생 2막에 대한 계획은 없다. 엄마가 되고 싶고, 다른 일도 해보고 싶은 막연한 꿈만 있을 뿐이다. 재용은 “길 가다 음악만 들어도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걸 보니 머잖아 그의 안무작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컨템포러리 쪽 활동을 더 해보고 싶어요. 2년 전 현대무용수들과 했던 ‘푸가’때 정말 많이 배웠거든요. 그런 작업들을 다양하게 해봐야 제가 안무할 수 있는 능력도 쌓이겠죠.”(엄)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박귀섭(photographer B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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