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코비치, 나달과 대결하면서 ‘테니스 황제’ 페더러와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인데 페더러가 은퇴하기 전에 꼭 한판 붙고 싶어요.”
한국 테니스의 ‘에이스’ 정현(21·한체대·세계 59위)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차세대 기대주’로 불렸던 그에게 2017년은 15년의 테니스 인생 중 가장 행복한 해로 기억될 만 하다. 지난 9월 세계 44위로 개인 최고 랭킹을 기록했고, 프랑스 오픈 3회전(32강) 진출로 메이저 대회 역대 개인 최고 성적을 달성했다. 또 지난 12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에서 우승하면서 한국 선수로는 이형택(41·은퇴) 이후 14년 10개월 만에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건 세계 1위 라파엘 나달(31·스페인)과의 두차례 맞대결이었다. 두 경기 모두 접전 끝에 패해 나달로부터 격려까지 받았다. 정현은 지난해 1월 호주 오픈에서는 당시 세계 1위 노박 조코비치(30·세르비아)와도 대결했다. 정현과 15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최고의 한 해를 보낸 심경을 들어봤다.
ATP 투어 우승한 정현 #작년 넉달간 출전 않고 교정 훈련 #포핸드 좋아졌으나 서브는 미완 #심리 상담받고 나서 멘털 강해져 #코트 밖에선 테니스 영상도 안 봐 #안경은 몸의 일부, 눈 수술 안할 것
- 지난해 100위 밖으로 떨어졌지만, 올해는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투어 대회를 다니면서 백핸드에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서브와 포핸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지난해 6월부터 4개월 동안 대회에 나가지 않고 교정 훈련을 했다. 그 때는 많이 힘들었는데, 조만간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이겨냈다. 서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포핸드는 많이 나아졌다. 스스로 포핸드 공격을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게 기쁘다. 지난해 100위권 바깥으로 떨어지는 아픔이 없었다면 올해의 기쁨도 없었을 것이다.”
- 예전과는 달리 실수를 해도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비결은.
- “멘털이 강해졌다. 테니스 선수 출신인 박성희 박사님과의 심리 상담이 큰 도움이 됐다. 벌써 상담을 받은 지 2년 정도 되는데 한국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박사님을 뵙는다. 외국에 나가면 수시로 전화를 통해 대화를 나눈다. 그 덕분인지 경기 후반에도 심리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특히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 대회 때는 지고 있어도 심적으로 힘들지 않았다.”
- 심리 상담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말은.
- “박사님이 ‘테니스를 하면서 느끼는 행복한 감정을 다른 일을 할 때도 느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힘들긴 하지만 테니스가 내게 주는 행복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편인가.
- “원래 생각이 많은 편이다. 코트에 들어갔을 때 내 리듬을 찾으면 바로 경기에 몰입한다. 하지만 리듬을 못 찾으면 생각이 많아져서 경기가 더 꼬인다. 생각을 단순하게 하기 위해 코트 안과 밖의 삶을 확실히 구분 짓기로 했다. 코트에서는 치열하게 싸우지만, 코트 밖에서는 라켓도 잡지 않고, 테니스 영상도 안 본다. 예전에는 테니스 비디오를 보면서 연구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달라졌다. 나달과의 맞대결 영상도 한 번도 안 봤다. 코트 위에서 뛰는 내 모습을 보는 게 부끄럽기도 하다.”
- 아시아 선수 최고랭킹(4위)을 기록했던 일본의 니시코리 게이(28)와의 맞대결(프랑스오픈 32강전) 장면도 안 봤나.
- “물론 안봤다. 내가 니시코리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아직 멀었다. 그렇게 위대한 선수를 쫓아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쫓아간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스트레스다. 그래서 구체적인 목표도 세우지 않는다. 주위에선 목표가 세계랭킹 몇 위인지, 몇 차례 우승하고 싶은지를 묻는데 마음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다. 말하면 그걸 지키기 위해 또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 팬들이 안경을 끼고 경기하는 모습을 안타까워 한다. 시력 교정 수술 계획은 없나.
- “투어 대회를 다니면서 안경 쓴 선수를 한 두 명 봤는데 나보다 눈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더라. 하지만 수술 계획은 없다. 어렸을 땐 렌즈를 끼는 것도 고려했지만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안경은 이제 내 신체의 일부다.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안 든다. 렌즈가 두꺼운 안경을 써야 시력이 1.0정도가 된다.”
- 쉬는 동안 뭘 하고 싶나.
- “다음 주부터 훈련에 들어간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 쉬는 기간 다른 스포츠 경기를 보고 싶다. 야구 시즌이 끝나서 농구나 배구를 보러 갈 생각이다. 훈련 틈틈이 학교(한국체대)에도 가야 한다. 운동 선수를 많이 배려해주지만 과제와 시험을 잘 챙기고 있다. 그래서 학점이 평균 3점대는 나온다. 인터뷰 요청도 많은데, 팬들이 테니스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신 덕분이다. 감사하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