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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생체 폐이식 성공 "이제 숨이 안 차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박승일 서울아산병원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와 의료진이 생체 폐이식 수술을 하고 있다.[사진 서울아산병원]

박승일 서울아산병원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와 의료진이 생체 폐이식 수술을 하고 있다.[사진 서울아산병원]

토요일인 지난달 21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 동관 3층 수술장(F로젯)에 수술방 3개의 문이 열렸다. 흉부외과 박승일 교수를 비롯해 마취과·호흡기내과·심장내과·감염내과 등의 의사 30여명과 수술전문 간호사, 심폐기사 등 50여 명의 의료진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긴장할 틈도 없이 각자 역할을 수행했다. 오전 9시 30분, 아버지·어머니의 폐의 일부를 떼서 딸에게 이식하는 '2대 1 생체 폐이식'이 시작됐다. 국내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미·일·유럽 이어 서울아산병원 성공 #부와 모의 폐 일부를 떼서 20세 딸에게 이식 #거부반응·합병증 같은 부작용 전혀 없어 #300여명 폐이식 대기자에게 희망 생겨 #생체 폐이식은 불법, 정부 법 개정하기로

4번 수술방의 수술대에서 딸 오화진(20) 씨의 망가진 양쪽 폐를 제거했다. 같은 시각 아버지 오승택(55세)씨가 5번 방의 수술대에 올랐다. 오씨의 오른쪽 폐의 아랫부분을 뗐다. 7번 방의 어머니 김해영(49) 씨의 왼쪽 폐 아랫부분을 떼 4번 방의 화진씨에게 옮겼다. 4번 방에서 양쪽 폐의 일부를 화진 씨에게 이식하는 대수술이 진행됐다. 수술은 8시간 넘게 진행됐다.

6일 후 부모가 퇴원했고 중환자실의 화진씨도 인공호흡기를 뗐다. 화진씨는 첫걸음을 내디디며 "선생님, 숨이 안 차요"라고 말했다. 수술 성공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환자는 이달 5일 일반 병동으로 옮겼다. 합병증·거부반응 등이 전혀 없다. 화진씨는 "수술 전에는 화장실 오갈 때 숨이 차서 세 발짝을 떼지 못했다. 서너 차례 쉬어야 했다. 지금은 다시 태어난 것 같다"며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비행기를 타고 멀리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아산병원은 15일 부모와 딸의 2대 1 생체 폐이식 수술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뇌사(腦死)자 89명의 폐를 이식했는데, 생체 이식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성공으로 국내 뇌사자의 폐를 이식받으려고 기다리는 300여명의 말기 폐부전 환자가 생체 이식을 활용할 길이 열렸다.

생체 폐이식 수술 모식도.

생체 폐이식 수술 모식도.

2014년 갑자기 숨이 차고 체중이 불어나고 몸이 붓기 시작했다. 폐고혈압이라는 희귀병이었다. 폐동맥이 두꺼워지고 폐동맥 압력이 올라 심장과 혈액을 주고받기가 어려워지는 질환이다. 심장도 망가져 급성 심장마비가 올 수 있다. 환자는 지난해 7월 심장이 멈춘 적이 있고 언제 재발할지 몰라 1년 생존 확률이 70% 미만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적같이 살아난 것이다.

이번 수술은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다. 장기이식법에는 신장·간·골수·췌장·췌도·소장 등 6개 장기만 생체이식을 할 수 있게 돼 있다. 장기이식 대기자로 등록해 뇌사자가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3등급대기 순번을 받았고 증상이 악화돼 1등급으로 올라갔지만 0순위가 아니면 받을 길이 없었다. 그때가 되면 심장마저 망가져 심장과 폐를 동시에 이식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화진씨는 다시 심정지가 오면 소생 확률이 20%에 불과했다. 2014~2017년 7월 아산병원 환자 68명이 폐 이식을 기다리다 32명이 숨졌다. 폐 이식 대기기간이 약 4년이나 된다.

딸이 죽어가는 걸 보던 부모가 나섰다. 아버지 오승택씨는 지난 8월 청와대 국민신문고에 "딸이 언제라도 심장마비로 돌연사할 위험이 매우 높습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폐의 전부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나와 아내의 폐 일부를 딸에게 주는 생체 폐이식 진행을 허락해주세요”라고 탄원서를 올렸다. 한편으로 생체폐이식이 합법인 일본으로 가려고 비행기 티켓을 끊기도 했다.

병원도 긴급회의를 수차례 열어 수술 가능성을 타진했다. 정부가 움직였다. 보건복지부는 장기이식윤리위원회를 열어 수술을 사실상 허용했다. 권준욱 공공보건정책관은 "위원회에서 부모가 폐를 공여해서 딸을 살리려 노력하는 점, 일본에서 성공사례가 많다는 점을 감안해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사후에 법령을 개정해 생체이식 대상 장기에 폐를 포함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승일 서울아산병원 교수가 생체 폐이식 수술을 받은 오화진씨의 쾌유를 기원하며 케이크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서울아산병원]

박승일 서울아산병원 교수가 생체 폐이식 수술을 받은 오화진씨의 쾌유를 기원하며 케이크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서울아산병원]

폐는 우측은 세 개, 좌측은 두 개의 조각으로 돼 있다. 폐암 환자들의 경우 폐의 일부를 절제하고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처럼, 생체 폐이식은 기증자 두 명의 폐 일부를 각각 떼어 폐부전 환자에게 이식하는 것으로 기증자·수혜자 모두 안전한 수술방법이다. 미국에서 1993년 시작해 400건 이상 시행했다. 일본은 98년 이후 매년 10건 이상 수술한다. 5년 생존율이 89%에 달한다. 화진씨 수술에 일본 교토대 의대 히로시다테 교수를 비롯한 의료진 2명이 참관하면서 수술을 도왔다.

오승택씨는 “기약 없는 이식 대기기간 중 심장이 언제 멈출지 몰라 날마다 지옥 같았으나, 수술 후 천천히 숨 쉬는 연습을 하면서 다시 건강을 찾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니 꿈만 같다. 깜깜했던 우리 가족의 앞날이 다시 밝아졌다”고 말했다.

아산병원 흉부외과 최세훈 교수는 “이번 생체 폐이식 수술은 뇌사자 폐이식 수술의 노하우를 가진 서울아산병원 폐이실팀과 딸을 살리고자 하는 부모의 강한 의지가 만나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칠 수 있게 되었으며, 예상대로 공여자와 수혜자 모두가 안정적인 상태이다”고 밝혔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김선영 기자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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