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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모델 삼을 만한 여성 리더들 보여주고 싶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57호 24면

배우 손숙 화가 천경자

배우 손숙 화가 천경자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한국무용가 김매자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한국무용가 김매자

발레리나 문훈숙 국악인 안숙선

발레리나 문훈숙 국악인 안숙선

소설가 박완서

소설가 박완서

‘문화계 마당발’로 불리는 사진작가 이은주(72)가 새로 찍은 사진들로 전시를 한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여성리더 18인’(11월 15~21일 선화랑)이다. 전시에 맞춰 사진집도 새로 내놨다. 지금까지 인연을 맺어온 문화예술계 인사 230여 명의 모습과 글을 담은 332쪽짜리 『사진으로 만난 인연』(안나푸르나)이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문화예술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 예인들의 ‘젊은 날의 초상’이 그 속에 있다.

예술인 사진찍기 40년 … ‘문화계 마당발’ 사진작가 이은주


대구까지 내려가 찍은 사진으로 국전서 대상

사진작가 이은주

사진작가 이은주

“명동 뒷골목에서 우연히 BBC 프로듀서였던 데이비드 해밀턴의 발레 사진집을 보게 됐어요. 표정과 몸짓은 물론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함에 ‘나도 공연 사진 전문가가 돼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여자가 혼자 카메라를 들고다니며 무대를 찍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가는 곳마다 텃세요 문전박대였다. 그래도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렇게 찍어댄 사진은 그러나 뭔가 많이 부족했다. ‘내가 춤 사위를 모르니까 이렇게밖에 못 찍는구나’ 하는 깨달음은 중앙대 무용과 청강생을 자처하게 만들었다. 국립·시립무용단을 찾아가 연습 과정을 지켜 보면서 몸짓과 동작을 어떻게 찍어야 멋지게 나올지 연구도 거듭했다.

“1980년 국립무용단의 ‘허생전’ 사진 취재 허가를 가까스로 얻어냈는데 서울 공연이 끝나 대구로 가서야 비로소 원없이 셧터를 누를 수 있었어요. 그때 찍은 사진이 이듬해 제3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서 사진부문 대상을 받은 ‘환희’입니다. 그 뒤 무용가와 음악가들의 프로필 사진 의뢰가 이어지면서 이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지요. 쇳덩이를 들고다니는 고단함과 비싼 필름 값에 대한 고민도 줄어들기 시작했고요.”

88올림픽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세계적인 공연단체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다니엘 바렌보임·주빈 메타·오자와 세이지·쿠르트 마주어·로린 마젤·샤를 뒤투아의 클래식 무대가 그의 차지였다. 볼쇼이 발레단과 프랑스 국립 발레단 롤랑 쁘띠,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과 피나 바우쉬의 부퍼탈 탄츠테아터도 마찬가지였다. 한 여성 월간지의 의뢰로 시몬느 베이유 유럽공동의회장 등 각국 여성리더 30명을 인터뷰한 경험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백남준과 오누이 같은 인연, 천경자가 멘토

미국 ABC 방송 ‘나이트라인’ 앵커 주주 장

미국 ABC 방송 ‘나이트라인’ 앵커 주주 장

현우디자인 대표 김민정

현우디자인 대표 김민정

1992년은 그에게 각별한 해다. 사랑하고 봉사하는 삶의 진정성을 깨우쳐준 마더 테레사를 만났고,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과의 오누이 같은 인연이 시작됐으며, 롤 모델이었던 천경자 화백을 ‘인생의 멘토’로 삼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마침 이번 사진집의 권두를 특별하게 장식하고 있는 인물도 백남준이다.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장은 “내가 본 진짜 백남준의 얼굴보다 (이은주 작가의) 사진 쪽이 훨씬 더 백남준스럽다”며 “그와의 정신적 동행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 영혼의 파장을 포착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묻는다.

사진집에 실린 인물들의 시공을 초월한 모습은 ‘우리 기쁜 젊은 날’을 절로 추억하게 만든다. 연극배우 손숙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 사진은 1970년대 후반에 찍은 겁니다. 그때 국립극단 배우였는데, 글 쓰는 써클에 갔다가 알게 돼 친해졌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최고의 멋쟁이였어요. 덕분에 연극도 참 많이 보러다녔네요.”

정경화가 바이올린 연주에 몰두한 사진을 찍을 때는 카메라 삼각대가 쓰러져 렌즈가 박살이 났다. 그때 정경화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는 “서양에서는 결혼식 때 와인잔을 일부러 깨는 전통이 있다.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위로했고 그 덕분에 백년지기가 됐다.

“항상 바쁘게 신인처럼 일한다”는 언론인 윤호미의 상찬대로,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몇 년 전부터 ‘여성 리더’를 찾아나섰다. “우리 사회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여성들이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사람들을 발굴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의도를 말한다. 세련된 유럽풍 인테리어로 명성을 얻고 있는 현우디자인의 김민정 대표,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빌딩 자리에 들어선 원월드트레이드센터를 설계한 건축 스튜디오의 유일한 한국인 건축가 신서영, 미국 ABC 방송 ‘나이트라인’ 앵커로 활약하고 있는 주주 장, 취리히 콘세르바토리 종신 부총장으로 있는 피아니스트 허승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을 포함한 18명의 모습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사진집 판매 수익금은 가난한 미국 교포 자녀를 후원하는 한미장학재단 동북지부에 기부할 예정이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이은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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