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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와 서자…무대 위로 올라온 을의 목소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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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고 배경 없는 사회적 약자, ‘을’의 목소리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파독 간호사의 실화를 담은 다큐멘터리 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와 조선 광해군 시대 계축옥사(1613년)를 다룬 창작 가무극 ‘칠서’다. 이주 여성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재독 간호사들의 삶과 계급차별 없는 새 세상을 꿈꿨던 서자들의 이야기에서 희망을 싹을 찾아내는 작품들이다.

다큐 연극 ‘병동소녀는…’, 팩션 가무극 ‘칠서’ #파독간호사와 『홍길동전』모델들의 희망 찾기

#이주민 노동자에서 세계시민으로

7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한 ‘병동소녀는 …’는 재독간호사들 개개인의 삶에 주목한 작품이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재엽이 2015년 2월부터 1년 동안 베를린에 머무를 당시 만났던 재독 간호 여성들의 행적을 무대 위로 옮겼다. 김 연출은 “‘외화벌이에 앞장선 애국자’라는 집단적 기억만으로는 들여다볼 수 없었던 개인의 역사를 탐색했다. 자신의 꿈을 찾아 독일로 건너간 간호 여성들이 세계시민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당시 간호사들이 독일 행을 선택한 것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큰딸이니 밥이나 하고 남동생들 뒷바라지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집을 떠나고 싶었고, “외국에 나가 연애도 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이들은 정착의 과정에서 이주 여성 노동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해갔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1976년 독일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의 계약 연장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을 때, 한인 간호사들은 서명운동을 펼쳐 체류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재독 이주 여성 공동체를 결성해 서로 연대하며 노동의 권리와 삶의 자유를 확장해갔다.

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진 예술의전당]

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진 예술의전당]

연극 개막에 맞춰 극 중 인물의 모델이 된 세 명의 파독 간호사들이 방한, 7일 프레스리허설을 함께 지켜봤다. 이중 최고령자인 김순임(73)씨는 “1966년 베를린으로 갔다. 내 생애 의미 있었던 순간순간을 연극이 사실적ㆍ감동적으로 표현해줬다. 스스로 공부하며 정치의 대상에서 정치의 주체로 변화한 순간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12일 공연 이후 관객과의 대화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공연은 다음 달 3일까지다.

#홍길동 탄생시킨 서자의 혁명

10∼17일 서울 신당동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서울예술단의 신작 ‘칠서’는 팩션 사극이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이 고조됐던 17세기 조선,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희생양이 된 ‘일곱 명의 서자’(칠서)와 이들을 모델로 『홍길동전』을 쓴 허균을 재조명한다. 창작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의 장성희 작가와 민찬홍 작곡가가 다시 뭉쳐 만든 작품이다. 뮤지컬 ‘페스트’‘셜록홈즈’ 등을 만든 노우성이 연출을, 국립무용단 주역 무용수 출신 이정윤이 안무를 맡았다.
작품 배경이 된 시대는 임진왜란 후유증 속에서 신분질서가 흔들린 때였다. 과거 응시 기회조차 주지 않는 시대의 부조리에 항거해 혁명을 일으킨 서자들은 결국 역모죄로 처형당한다. 우두머리이자 홍길동의 모델이 된 서양갑 역은 배우 박영수가 연기한다.

창작 가무극 '칠서'. [사진 서울예술단]

창작 가무극 '칠서'. [사진 서울예술단]

서울예술단 측은 “능력이 있으되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칠서’의 서자들은 이 시대의 수많은 ‘흙수저’들의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칠서’는 젊은이들이 스스로와 맞바꾼 꿈에 대한 이야기로, 절망의 세상에서 싹트는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자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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