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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와 흐루쇼프에게서 배울 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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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수석
고수석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북한학 박사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북한학 박사

미국 전략폭격기의 핵심인 B-1B 랜서가 지난 9월과 10월 한반도에 출격했다. 그 이전에도 한반도 상공에 출현한 적이 있지만 9월에는 북한 강원도 원산에서 350㎞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다. 데이나 화이트 미 국방부 대변인은 "21세기 들어 어떤 폭격기보다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가장 멀리 북쪽으로 비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B-1B 랜서는 사거리 370㎞를 자랑하는 AGM-158 JASSM 순항미사일을 최대 24발까지 장착이 가능하다. B-1B는 북한의 영공·영해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북한을 타격할 수 있다. 만약에 북한이 이를 기습 공격으로 오해하고 공포심에서 군사 대응을 했더라면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뻔했다.

남북한과 미국은 지금 ‘기습 공격의 상호 공포’ 속에 놓여 있다. 이 말은 상대방이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할 수 있고, 그 역도 성립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200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토머스 셸링(1921~2016)의 저서 『갈등의 전략』에서 나온 말이다.

‘기습 공격의 상호 공포’ 가운데 대표적 사례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다. 핵전쟁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그해 10월 27일 쿠바 상공을 정찰 중이던 미 정찰기 U-2기를 쿠바 주재 소련 지휘관이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했다. 미사일 발사는 소련 크렘린의 허락 없이 이뤄졌다. 말리노프스키 소련 국방장관은 공군 지휘관에게 “너무 성급했다”고 문책할 정도였다. 미 국방부는 보복공격을 제안했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이를 말렸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U-2기가 시베리아의 소련 영공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의 미그 항공기가 U-2기를 요격하려고 이륙했다. 다행히 U-2기는 간신히 빠져나갔다.

흐루쇼프는 이를 소련 공격을 위한 미군의 정찰 임무로 간주했다. 이로 인해 의도치 않은 심각한 전쟁을 불러올 수 있었지만, 흐루쇼프는 미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추가 군사도발을 하지 않았다. 이런 벼랑 끝 상황에서 양국 지도자는 인내의 용기를 발휘해 비밀협상으로 제3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1박2일 일정으로 7일 방한한다. 그의 말과 행동이 한반도 위기를 악화시킬 수 있고 약화시킬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B-1B 랜서를 통해 강력한 적극성이 소극적 신중성보다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뜻을 보여줬다. 이제는 그가 한반도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함께 ‘기습공격의 상호공포’를 줄여나갈 때다. 이번 방한에서 그의 담대한 평화 메시지를 기대해 본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